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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May 09. 2020

1. 여행의 시작,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20시간의 비행을 견디는 현명한 자세에 대하여.


 장시간 비행에 대해 두려움은 없었다. 유럽 정도는 다녀온 경험이 있었고 애초에 어디서든 머리를 기대는 순간 스르륵 잠들어버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1시간 경유 미포함) 20시간 비행의 길은 정말 정말 쉽지 않았다. 동시에 장시간 비행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런 계획 없이 설렘만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호되게 당했다는 뜻이다. 적당한 웹툰 몇 편과 넷플릭스 몇 편만 있다면야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금방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야. 라는 자세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 자다 깨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건 기본. 어찌 이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가 이게 바로 시간의 상대성이라는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념 속에서 퉁퉁 부어오는 다리와 발을 보고 있노라니, 어떻게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자세를 취하고자 몸을 비틀어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어떤 자세도 (애초에 장시간 비행을 대하는 자세가 글러먹었기 때문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거 같다. 정말이지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와인 아니었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출발한 절친 N과 나는 마치 생명수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모든 기내식의 음료로 와인을 주문했고 승무원들은 친절하게 가져다주었다. 장시간 비행이 곧 일상인 승무원들과 디오니소스에게 즈려밟힌 포도를 향해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경배를. 

에티오피아 항공 & 와인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타운으로 집합!


 최대한 하중을 분산하는 자세를 번갈아 가며 취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피부는 뒤집어지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어둔 채 초췌하디 초췌한 꼴로 비행기에서 내려 아프리카 대륙에 첫걸음을 딛자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과 후덥지근한 공기가 동시에 반겨주었다. 주워 들어온 악명에 비해 케이프타운 공항의 입국 수속은 매우 간단했다. 이렇다 할 절차 없이 순조롭게 수속을 마쳤고 우리의 캐리어도 이 날따라 빠르게 나온 듯한 착각 속에서 설렘은 점점 커져갔다. 여섯 달간 짐바브웨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케이프타운에서도 이미 이틀을 보냈던 친구 K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와 함께 렌터카를 픽업하고 익숙하지 않은 우핸들과 도로를 열심히 달려 에어비앤비에 도착. 단언컨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샤워 중 하나였다고 자신한다. 


 한편 이집트를 떠나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를 여행하던 일행 S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분명 우리의 비행기가 출발하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국내(이 때 국내는 남아공)에서 출발하는 대형 버스를 탑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체로 인해 아직도 도착을 못한 것이다. 그래도 20시간 버스보다는 비행이 낫지 않을까 심심한 위로를 얻으며 여유 있게 준비하고 장을 보는 등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을 멘 S가 도착했다. 그렇게 학교는 같지만 전공은 다르고 이름은 들었지만 면식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4명이, 각각 인천에서의 학업과 짐바브웨에서의 업무와 이집트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남아공의 수도에서 집결한 것이다.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타운, 케이프타운의 중심 테이블 마운틴


  정상부가 평평한 산을 의미하는 테이블 마운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모두가 아 저것이 바로 테이블 마운틴이구나,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중심에 거대하게 위치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가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트레킹 코스도 존재한다고 한다. 날씨만 좋다면 케이프타운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환상적인 일몰 또한 덤으로 볼 수 있다고 하니 첫 여정지로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막상 입구에 도착해서 케이블카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케이블카 말고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원통형 탈것에 서른 여명이 우르르 탑승하고, 매우 빠른 속도로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어릴 적 읽었던 찰리와 거대한 유리 엘리베이터를 연상시켰다. 정상에 도착하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은 고원이 드러났고 마치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재미있는 건 테이블 마운틴과 제주도가 함께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선정 담당자의 취향이 짐작 갈 정도의 유사함이었다. 

 

테이블 마운틴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적절한 바위를 골라서 걸터앉아 일몰을 감상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았기에 미리 자리를 선점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몰과 함께 즐길 간단한 먹을거리나 맥주, 와인 등을 챙겨 왔다. 위에서 파는 곳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맥주 없이 일몰을 볼 뻔했다. 평소에 즐겨마시던 라거가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에일을 구매했지만 그 어쩔 수 없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근 며칠간 남아공 날씨가 흐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날은 우리의 여행 첫 날을 기념하듯 쾌청했고 덕분에 완벽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의 색은 시시각각 변했고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저물어가는 햇빛에 서서히 물들다가 어느 순간 반짝거리는 야경으로 변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양 옆이 넓게 트인 일몰. 평평한 고지대에서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테이블 마운틴


 해가 진 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어느새 하산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고 케이블카 막차를 놓치는 순간 영락없는 야밤의 트레킹 확정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려왔다. 저녁은 아까 장을 봐 둔 냉동피자와 치킨튀김 그리고 와인 세 병이었다. 에어컨의 부재와 모기 한두마리의 자기주장에도 불구하고, 비행부터 시작된 강행군 뒤 와인은 편한 잠자리를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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