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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불 May 28. 2023

거듭난다는 것의 여러 의미


거듭난다

구원받았다

새로 태어났다.



이런 표현들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은 기독교이다. 죄인인 인간이 죄사함 or 구원을 받았기에 침례 또는 세례를 받으며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현상이 아니다. 또 다른 종교 속에서 진리를 깨우치거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그 역시 거듭난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귀인을 만나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게 되거나 어떤 작품이나 상담을 통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역시도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데미안』에 이런 말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단순한 이 문장 속에 하나의 생명체가 거듭나는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신이 속해있던 한 세계를 파괴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아는 것,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 등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 속에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세계가 전부라 생각한다. 물론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자신이 지닌 본성이나 성격을 바꿀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삶을 원한다면 일부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삶을 꿈꾼다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싶다면, 기존 세계를, 과거라는 세계를, 알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많은 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새롭게 태어난 그 과정이 백프로 신의 이끌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그 세계로 안내해 준 존재는 신이나 안내자일지 몰라도 그 세계로 들어간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아무리 좋은 길로 이끌어주려 해도 스스로가 그 세계로 들어가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반대로 정말 좋은 세계인 것 같아도 스스로 아니라 판단하여 나온다면 그 역시 현명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자들이 판단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버린다. 분명히 순서가 있다. 여러 사람들을 보내 길을 이끌어주었더라도, 본인의 선택이 먼저고, 그 세계에 들어간 것은 나중이다. 즉 거듭나는 그 과정에 동참하는 것은 여러 신들일지 몰라도, 거듭나는 것의 주인이자 주체는 본인이다.



거듭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온갖 핍박을 받고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누구보다 평온한 상태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다. 등장하신 후 인간들을 향해 많은 가르침을 전한 뒤 때가 되었을 때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더 따르기 시작했다. 즉 사람들은 후자를 보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예수님이 새로이 탄생하신 것, 거듭나신 것, 그것은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몸으로써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셨기에, 본인이 수행해야 하는 일들을 묵묵히 수행하셨기에,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의 역할을 내버려 두었기에, 인간의 몸으로써 죽고 다시 태어나신 것이다. 그것을 무지한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기독교 내에서 구원받았다, 죄사함 받았다 말한다. 그래서인 걸까? 세상의 수많은 자들이 열심히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어느 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된 것,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내면의 변화가 생긴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살아온 스토리를 통해 자기 내부에 필요한 무언가를 깨달았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사람마다 간증이 다른 이유). 그 과정에는 기존의 부패되고 삶에 해가 되었던 특성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에 필요한 행위들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고통스럽게 느껴지니 중도에 포기해서 기존의 삶으로 돌아가는 즉, 거듭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천지 때깔이다.



거듭나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하지만 운명을 개척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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