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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불 Mar 03. 2023

몰입이 주는 통찰

자신을 잊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에 흠뻑 빠진 순간. 그 순간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는 관심 없다. 그저 내가 속한 그곳에, 내가 몰입하고 있는 그곳에, 내가 몰두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만 바라볼 뿐이다. 그 '일'이라는 것은 아주 다양하다. '자연을 한참을 바라보는 일' 일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일 수도 있고, '어떤 사고를 당한 일' 일 수도 있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일 수도 있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는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일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일' 일 수도 있다. 그 순간에 들어가면 좋은 것만 가득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고통이 스치고 있다. 자연을 한참이나 바라볼 때 '나는 먼지 같은 존재인 것만 같은 좌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나올 수 있는 성과',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슬로우 모션으로 저장되는 기억',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 '알고 싶지 않은 진실까지 보게 되는 아픔',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외면하고 싶은 해결 방법', 소중한 사람에게만 집중해야 할 때 '한 번쯤 짊어지고 가야 하는 책임감'. 이 모든 것들이 고통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 순간에 몰입한 나머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자아가 그 순간에는 현상 속의 이데아 만나, 세상에 존재하던 고통을 순수한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되면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자신을 재구성하고, 통찰을 느끼게 된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 역시 이 원리가 작동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사건을 겪은 자에게는 모든 과정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느린 버전으로 마음에 남는다. 제3자의 입장에선 그저 한 사람, 그저 한 공간, 그저 하나의 물건이겠지만, 당사자에겐 어떤 표정 지은 한 사람, 어떤 분위기였던 공간, 모양이 어떤 물건 등 자세히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사실인지 왜곡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만큼 당사자에게 강하게 기억되었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렇게나 강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강렬한 느낌에, 강렬한 순간에 순식간에 들이닥친 일이라서 갑자기 궁지에 몰린 자아가 깨어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평소에는 너무나도 빨랐던 그 세상이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세상의 모든 흐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던 것처럼 되어 버린다. 어쩌면 그래서 '그 순간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죄책감으로 오랜 시간 괴로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음에도 통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말이다.



하지만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우리는 그 기억을 저 밑바닥으로 밀어 넣는다. 각성된 상태에서는 고통이 고통인지 몰랐는데,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죄책감이다. '만약' '내가' '그 순간에' '이렇게 했더라면' 이 가설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언젠가 한 번쯤 다시 그 기억을 들여보아야 한다는 것. 그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간다면, 경직된 인간이 되어갈 뿐 아니라 나로서 존재할 수 없으니까.



인간이 기억하는 모든 순간은 조금씩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본인이 힘든데도 진실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는 압박으로 기억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이었고, 상황이 어땠는지를 먼저 이야기하면 압도되므로, 현재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순간에 대한 감정을 먼저 봐주어야 한다. 공포로만 가득했던 시선이 차츰 옅어졌을 때, 다시 그 상황을 멀리서 관찰해야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고통 자체였던 트라우마를 조금씩 조금씩 들여다보다 그 세상으로 들어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가 마주쳤을 때, 서로 하나가 되면서 자신을 재구성하고 또 다른 나 발견하게 되면서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문장은 짧으나 과정은 길다). 그리고 그것을 외상 후 성장/통찰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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