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야 울 민지구나, 나는 암 씨랑도 안 한다.. 바쁜 사람이 뭐덜라고.. 오덜말아야. 잘있응께. 잊은 듯이 살아라. 오냐, 들어가라잉."
또 면회를 거절당하고 돌아가던 길,
삼촌과의 마지막 통화, 마지막 삼촌의 당부. 구정 전에 엄마를 모시고 갔을 때도 병원에 사정했었다. 한 번만 면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이놈의 코로나는 이렇게 잔인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펑펑 울었고 전화기 속 언니는 보내드리는 것이 효녀인지 붙들고 심장만 뛰게 하는 것이 효녀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울었다. 덩달아 운전하던 나도 울었다.
시답잖은 하루를 살지만 죽음을 대면하면 살아있다는 것이 이토록 대단하다.
또랑또랑 말씀도 잘하신다고 겨울은 넘기겠다고 봄에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얘기한 지 불과 열흘 남짓. 그런데 이렇게 훌쩍 우리 삼촌이 가셨다. 오래 외롭게 요양병원에 갇혀 계셨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가족들은 얘기한다. 그러면서 모두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하다. 오랫동안 맘의 준비를 해왔던 장례식장에 통곡은 없었다. 그러나 꼭 끌어안은 가슴마다 들썩이는 회한과못다 한 이야기와 힘들었던 시간이 스며들어 있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잠자듯 떠나는 것이 복중에 최고라며 엄마는 오빠는 왜 그 복을 못 타고났을까 눈물을 글썽였다. 민지야 우리는 연명치료하지 말아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선택의 순간이 없도록 엄마도 아빠도 그 "복"이라는 걸 갖고 계시면 좋겠다. 나에게도 곧 다가올 미래인데 실감이 안 난다.
언니는 입관식을 보지 않겠다 했다. 10월에 마지막으로 만난 삼촌이 깨끗하고 예뻤고 너무 좋았다고 그 모습만 기억하고 싶다 했다. 엄마만 남겨두고 돌아서 나온 밤. 이모도 새벽 일찍 광주에서 오실테고
모처럼 삼 남매가 모일 테니 엄마는 그제서야 언니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겠지.
"아야, 오지 마야, 민지엄마야 잊은 듯이 사소" 내게도 엄마에게도...
삼촌은 자기를 잊은 듯이 살라하셨다. 그게 참 마음이 아프다. 아픈 사람은 아프다는 말 대신 행여 부담이 될까 짐이 될까 싶어 져서 자신을 잊고 살라 당부한다.
허리 수술한 지 얼마 안돼 복대를 차고 있는 흰머리 희끗한 외숙모는 장지에는 오지 말라 하신다. 내 모든 졸업사진에는 삼촌이 계시다. 삼촌이 생을 졸하셨는데 내가 안 갈 수가 있나. 삼촌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린다. 예쁜 외가 사촌 언니들 사이에 키만 불쑥 크고 까맣고 깡말라 병치레만 하던 나를 식구들이 놀리면 빙그르르 웃으며 말씀하시곤 했다. "예 말이오, 두고 보소, 우리 민지가 젤로다가 멋있게 큰당께. 안그냐 민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