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만난 예술교육>을 읽고_
시대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
우리는 토양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유럽의 문화예술교육 사례들을 마주했을 때,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져진 '태도와 풍토'였다. 흙 깊숙이 내려간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들.
이 토양을 형성한 요소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문화예술교육은 공공의 가치를 위한 개인의 헌신에서 시작한다.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진 주체들이 움직이는 생태계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보편성과 탁월성이 공존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되, 그 내용과 질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 균형. 더불어 현장의 모든 주체들 사이에는 신뢰에 기반한 협력적 네트워크가 작동했다.
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닌, 철학과 목적의 공유에서 비롯된 협력이었다. 반면, 한국의 모습은 어떠한가?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유럽의 사례를 빠르게 수용했다. 그러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는 것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비판 없이 외형만을 수용했다. '왜'보다 '어떻게'에 집중하며, 씨앗을 심을 문화적 토양의 준비는 소홀히 했다. 행정 중심의 단기성과주의는 깊이 있는 뿌리내림을 방해했고, 전문성과 협업의 균열은 지속적인 발전을 가로막았다.
이제는 다시, 문화예술교육의 토양을 묻는 일이 필요하다.
예산이나 프로그램의 확대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에는 반드시 '사람'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회복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네 가지 방향이 필요하다.
공공성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질문의 복원이 첫걸음이다. "예술교육은 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기성과를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구조 설계, 즉 '느린 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문화예술교육 주변부에 있는 모든 주체 간의 신뢰 기반 협력 구조가 정립되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육이 품고 있어야 할 본질적 '기쁨'의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자유의 기쁨, 인내의 기쁨, 사랑의 기쁨—이것은 문화예술교육이 추구해야 할 공공의 가치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빛이다.
그러나 역설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감각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려는 현대의 강박 속에서, 우리는 불가능한 증명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아마도 진정한 과제는 증명 불가능한 것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용기,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중요성을 신뢰하는 지혜를 사회적으로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이제는 그 씨앗이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토양을 가꾸어야 할 때이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넘어, 태도와 철학의 문제이며, 미래 세대에게 남길 우리의 문화적 책임이다. 이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철학 Q. 우리 사회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해야 할 고유한 '공공의 가치'는 무엇인가? 한국적 맥락에서 재정의된 예술교육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럽 예술교육 철학을 수용 +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한 교육 철학)
시스템 Q. '느린 제도'를 구체화하기 위해 현 행정체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해야 할 평가와 성과 측정 방식은 무엇인가?
탁월성(내용) Q. 탁월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
기여 Q. 한국 문화예술교육이 나아가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독창적 모델과 방향성은 무엇인가?
_2025년 4월 교육연극연구소 사유무대 권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