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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예술에서 존재의 예술로

<예술적 상상력: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을 읽고_

by 사유무대

연극놀이 : <여지>

1. 기억을 떠올리기
각자 최근 일주일 안에서‘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이‘인상적’이란 느낌은 아주 주관적일 수 있다. 예: 계단에서 마주친 고양이, 엘리베이터 안의 정적, 낯선 이의 짧은 미소 등


2. 인상의 조각
떠올린 장면 속에서 사람, 사물, 감정, 분위기 등 하나를 골라 정지된 자세로 표현한다.
말없이, 단지 그 장면이 되어서 멈춘다.


3. 여지의 확장
이끔이가 인상적인 한 명을 선택하여 무대 중앙에 다시 정지하게 한다.
나머지 참여자들은 그 자세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나의 기억의 잔상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어떤 인물, 소리, 움직임, 짧은 대사일 수 있다. 정지된 존재를 중심으로, 한 명씩 들어가 조각처럼 덧붙이거나, 짧은 퍼포먼스를 즉흥적으로 표현한다. (각자의 인상의 표현이지만, 무언가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4 4. 나누기
처음 정지했던 참여자가 그 장면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 상상한 다른 무엇에 대해 얘기 나눈다. 제3자(관객)의 입장에서 본 전체 그림에 대한 감상을 함께 듣는다.



연극놀이 <여지>를 통해 나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충동적이고 개인적인, 그 이름 모를 인상들이 모여 예술이라는 것이 태어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창작 방법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발생 지점에 대한 것이다.
이 놀이에서 우리는 각자의 느낌을 '말하지 않고 표현한다'. 이어서 타인의 표현을 보고도 '말하지 않고 표현한다'. 느낌이라는 것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공간에 오래 붙잡아 두려는 시도이다. 명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인상들, 이름 모를 정체들이 주는 모호함은 날것의 감정, 오랜 기억을 자극하고 소환하는 힘을 가진다.



연극 놀이는 3가지 전제가 있다.

1. 자신이 본 것을 '무엇이다'라고 규정짓지 않는 것.

2. 단지 나의 느낌과 감각을 신뢰하는 것.

3. 내가 신뢰한 것을 모두가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표현하는 것.


예술은 그렇게 발생한다. ‘미칠듯한 궁금증, 턱밑까지 차오르는 말, 귀에 맴도는 소리,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이야기, 그리고 어떤 이름 모를 감정으로부터’이 강렬한 예술의 시작은 무모하며, 계산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사적인 충동은 관객의 감각기관에 침투하여 잔상을 남긴다. 그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잔상들은 지극히 사적인 순간에서 발생하여 인류의 영속적인 시간 안에 놓이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말해지지 않은 감각들 사이에서, 예술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 예술교육이 존재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그림을 사랑한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하지만 사실 그 그림에 담겨 있는 모네의 '시간'을 더 사랑한다. 모네는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하루 종일 한 곳에 머무르며 빛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렇게 보낸 모네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빵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시간, 누군가에게는 파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모네의 시간은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빛의 미세한 변주를 감지하는 특별한 감각의 영역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느리게 펼쳐지는 자연의 숨겨진 서사를 목격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린 예술품을 사랑하기보단, 예술가의 헌신과 영혼의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인류가 급속도로 문명화되면서 사람들은 '시간'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시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시간은 곧 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돈 같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예술을 직접 하기보단 예술품을 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가의 시간을 사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예술작품을 귀속시키면 그 예술가의 시간까지도 귀속시켰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유의 욕망 이면에는 사실 시간에 대한 갈증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 돈과 교환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 '영혼의 시간'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유례없는 시간의 홍수의 시대를 맞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더 풍요롭게 먹고, 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남아도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싶어 할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것이 '예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인류가 그토록 원해왔지만 '돈과 시간'이라는 실존적 압박에 밀려,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하나쯤은 숨겨둔 꿈_ ‘예술가’ 말이다. 이제 인간은 ‘예술’이라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예술’이 되고자 할 것이다. 소유의 예술에서 존재의 예술로, 돈으로써의 시간에서 영혼으로써의 시간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예술교육은 이 결정적 변곡점에서 필요해진다. 남아도는 시간이 주어질 때, 사람들은 그 시간 속에서 감각하고 표현하려는 본능,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그 원초적 충동을 꺼내게 될 것이다. 연극놀이 <여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언가를 천천히 감각하며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늘어날 것이다. 그동안 일과 생존에 너무나 지쳐버린 사람들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고 각자의 본래적 형상으로 회귀하는 일에 예술교육은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예술교육은 성급한 평가를 유보하고, 불완전한 표현을 인내하며, 아직 이름 없는 감각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모네와 같은 예술작품을 만들 순 없어도, 빛을 따라 오랜 시간 호수를 바라봤던 그 모네의 시간만큼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에 지쳤던 사람들이 모네가 호수 위에 내려앉는 황혼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깊은 침묵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



_2025년 4월 교육연극연구소 사유무대 권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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