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안을 두고 논쟁을 할 때 의견 조율이 안되고 평행선을 가는 경우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역지사지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 즉 상대편의 처지나 형편에서 생각해 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논쟁이 길어지고 언쟁으로 가는 이유를,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과 주장만을 펼치고 있으니 타협을 할 수 없고 의견일치를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들이미는 것이다.
과연 역지사지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역지사지에 대한 전형적 오류다.
역지사지로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언어 그대로 말하게 하고 주장하게 하고 나는 오롯이 그 말을 들어야 한다.
역지사지는 나의 주관성에서 출발한다. 나를 기본 전제로 놓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니 상대방의 입장을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 가져오게 된다. "내가 당신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듯하군요"정도의 배려일 뿐이다. 역지사지의 생각에는, 상대방이 그런 생각과 의견을 내놓기까지 축적된 행동이 빠져있기에, 상대방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해석일 뿐이다.
역지사지의 유래를 먼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자성어는 맹자의 '이루(離婁) 하' 편에 나오는 '역지 즉 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한 말이다. "우임금과 후직은 홍수가 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백성을 구하며 살았고, 공자의 제자였던 안회는 비교적 평온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가난한 마을에 살면서 소쿠리밥을 먹고 표주박 물을 마시며 소박하게 살며 학문을 즐겼다. 만약 이들이 서로의 시대를 바꾸어 태어났다면 우와 직은 안회처럼 살았을 것이고 안회는 우와 직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이들은 처지를 바꾸어도 모두 그러했다"
즉 '역지즉개연'에는 처지가 바뀌어도 그렇게 헸을 거라는 시대적 상황과 행동이 들어가 있다. 우리가 지금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축소해서 해석하는 '역지사지'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역지사지는 소극적 생각일 뿐이다.
역지사지가 힘을 발휘하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의 처지에서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언행을 그대로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는 김건모의 노래 '핑계'에 맞는 한자성어는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이 더 적당하다. "네가 원하지 않는 바는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는 이를 '서(恕)'라 했다. 남의 처지를 헤아리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논쟁의 꼬투리를 잡는데 쓰일 뿐이고 자신을 더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입장은 오롯이 상대방의 입을 통해서만 정확히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거짓과 포장으로 덧칠을 할 수 있으나 들어보면 안다. 그때서야 왜 상대방이 저런 말을 하는지 정황이 파악된다. 내 개인 주관으로 미리 넘겨짚게 되는 역지사지는 판단에 혼선만 가져올 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들어보라.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진실은 물론 거짓조차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씩 진실은 합치고 거짓은 드러내 가려낸다. 드러난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거짓은 핑계와 변명으로 덮어지는 게 아니다. 덮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욱 수렁에 빠지는 것이 거짓이다. 거짓은 거짓을 낳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를 이해하는 힘은 상상력이 아니라 경청(傾聽)에서 나온다. 상대의 말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기보다, 상대의 언어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 이것이 우리가 잊고 있던 진짜 역지사지이며, 갈등을 줄이고 관계를 회복하는 가장 단단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