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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23. 2024

시공간 속, 존재의 의미


가끔 종이에 끄적이는 방정식이다. 나는 뼛속까지 문과다. 혈통 자체가 문과이기에 어쩔 수 없다. 고려말 정몽주, 정도전을 제자로 두었던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과의 방정식을 기웃거린다. 그저 어깨너머로 훔쳐볼 뿐이다. "이 정도는 외우고 쓸 수 있어" 정도의 과시욕도 작용한다. 뭔 소리인 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저 방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눈치로 때려잡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라고 할 뿐이다. 평생 저 방정식을 푸는 과정을 세 번 정도 따라 써봤다. 푸는 과정을 알고 이해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칠판에 그려지는 숫자와 기호를 그림 그리듯이, 노트에 4시간 정도 따라 그려봤을 뿐이다. 그리고 "세상을 안다는 데 있어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써 본 사람과 안 써본 사람으로 나뉜다"라는 건방진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래서 가끔 저 방정식을 잊지 않기 위해 써보는 것이다.


눈치채셨겠지만 방정식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증명하는 중력장방정식이다. 좌변은 시공간의 곡률이고 우변은 물질과 에너지의 시공간적 분포를 나타낸다. 즉 물질 에너지가 시공의 곡률과 같다는 공식으로, 질량에 의해 시공이 휘어진다는 것을 계산해 낼 수 있는 방정식이다.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라고 일갈할 수 있다.


먹고 자고 싸고 사는 데는 전혀 필요 없는 방정식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발 디디고 있는 이 지구와 이 지구에 생명을 키워낸 태양과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는 정도로 시선과 관점을 확장하는데도 이 방정식이 필요하고,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을 라그랑주 지점에 정확히 안착시켜 우주 근원의 심도를 들여다보는데도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은 세상과 우주를 보는 다른 차원의 시선이자 방향의 시작이다.


"뭐 그래서? 빛이 휘었는데 뭐 어쩌라고?" "태양이 당장 내일 꺼지기라도 한데?" "아침식사도 안 해 배고파서 점심 뭐 먹을까 고민 중인데 방정식으로 풀면 배가 불러지기라도 해?"라고 꼴통 문과의 질문을 던지고 달려들면 할 말도 없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장 방정식을 가끔 떠올리고 써보는 이유는 써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공간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살아있음에 대한 사유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연한 오리무중의 사유가 아닌, 숫자로 실체를 증명해 내는 명확함으로 존재를 보게 된다. 리치텐사가 어떻고 메트릭 텐사가 어떻고 스칼라가 어떻고 뉴턴 상수가 어떻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뼛속까지 문과인데 눈에 들어올지조차 없다. 하지만 자꾸 쓰다 보면 아인슈타인이 무얼 도출해 보여주려고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과와 문과가 겹치는 접점을 만나게 된다. 물질 에너지가 시공의 곡률과 같은 것처럼 이과와 문과가 아예 다른 것이 아니라 접근의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다만 이과는 우주에 통용되는 법칙을 증명해 내고 문과는 추상에 개별적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과는 숫자로 명확히 말하고 문과는 두리뭉실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잘 던지는 능력이 명확한 숫자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가늠자가 된다. 문과와 이과의 조화가 필요한 이유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유언이 "사생지리(死生之理) 오무의의(吾無疑矣) ;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이다. 조선 건국 초기인 1396년이고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이 나온 것은 1915년이다. 대략 500년의 시공이 휘어져 만난다. 기껏해야 100년도 겨우 살아내는 한 개체로서 살아가고 살아내는 존재로서의 나는 무엇인지 질문을 한번 던져볼 일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해 낸 중력장 방정식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가만히 관조해 볼 일이다.


그리고 나서야 지금 작렬하는 태양의 뜨거움과 그 뜨거움을 가려주는 구름의 존재, 그리고 신록의 그늘,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의 정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그 존재들의 형상을 인식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또 얼마나 위대하고 작은 지조차 알게 된다. 자연 앞에 무릎 꿇고 엉엉 소리 내어 울 일이고 하하하 큰 웃음 한번 질러 볼 일이다. 살아있다는 나의 존재는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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