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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7. 2024

딸아이 결혼식 앞두고 경고받다 - 울지 마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이상하죠. 뭐에 대해 쓰라거나 누구에게 써달라고 대상을 정해주면 첫 줄 쓰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거의 매일 A4용지 두장 분량의 글을 20년 가까이 쓰면서도 말입니다.


왜 멍석을 깔아놓으면 글빨이 안 날까요?


대상을 특정 지어 놓으면 부담으로 작동되기 때문인 듯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글 소재의 부담이 적어집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쓰던, 허공에 대한 메아리일 수 있으니 쉽게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주제는 있으되 혼잣말하듯 쓰면 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라고 대상이 정해지면 주제가 한정됩니다. 한정된 주제 안에서 소재를 찾다 보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대상이 정해졌을 때 글빨이 안나는 이유는 그만큼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제와 소재에 대한 빈약한 정보 때문입니다. 무엇을 끌어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거의 한 달 넘게 글 소재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큰 딸아이 결혼식이 5월 19일이니 2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신부 아버지의 축사를 빨리 내놓으라는 재촉이 있음에도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기말고사 논술 문제를 받았는데 아직 한 줄도 못쓰고 백지를 앞에 놓고 있는 형국입니다. 오늘이 마감이랍니다. 축사를 미리 주면 프린트를 해서 단상에 준비를 해놓을 예정이랍니다. 마감시간에 쫓기니 더 초조해집니다.


"아니 축사야 그냥 애드리브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축사 구성이야 뻔하잖아? 하객들께 감사인사 드리고 신랑 신부에게 덕담 몇 마디 하고---"


그런데 막상 그게 아니었습니다.

축사 의뢰는 딸아이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에세이 책도 냈고 글을 좀 쓴다고 하니, 양가 어른을 대표해서 축사 기회를 주겠답니다. 결혼식 전체 판도를 결혼 당사자들이 다 짜니 부모 된 입장에서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축사라도 할 기회를 안 주었으면 결혼식 내내 멀뚱멀뚱 서서 하객들께 인사만 하고 말 뻔했는데 다행이긴 했습니다. 다만 축사를 하는데 조건이 있답니다. 축사를 하다가 신부 아버지라고 눈물 질질 짜는 행위는 절대 금지라는 경고입니다. 딸들을 시집보내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대부분 마음을 단단히 잡고 가지만 단상에 서서 축사를 하다 보면 대부분 울컥하고 눈물을 보인 답니다. 딸을 둔 아버지의 눈에는 세상 모든 남자들이 '놈'으로 보인다는 말이 진실로 다가온답니다. 한방에 이해가 되고 현실로 닥쳐옵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자녀 결혼은 부모 마음대로 안됩니다. 자기들이 하고자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 여식이 결혼한다고 사위될 녀석을 데려왔을 때 저는 "얼씨구나" 했습니다. 주변에 비혼을 선언하고 사는 젊은이들이 널려 있는 세상인데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습니다. "그래 이왕 할 거면 빨리빨리 해라" 등 떠밀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만났다고 해서 묻거나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10년 세월 만나며 내린 결론인데 얼마나 신중했겠습니까? 천생배필이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축사는 신랑 신부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간단히 당부할 덕담 2가지 정도만 써서 줄 예정입니다. 결혼식날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사실 당사자들에게는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축사는 써서 주되 결혼식장에서는 읽지 않을 예정입니다. 축사는 서면으로 대신하고 결혼식날은 귀한 시간 내서 축하하러 왕림하신 하객 여러분께 신랑 신부를 간단히 소개하고 사돈 어르신도 올라오시게 하여 같이 감사인사를 전하는 시간으로 사용할까 합니다.


축사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인지 궁금하신가요? 미리 공개하면 재미없을 듯합니다. 아니 이미 짐작하고 있으신 내용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는데 특별히 다를 게 없더라는 것은 다들 눈치채고 계실 것입니다.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느냐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질을 결정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 안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 정도를 담아볼까 합니다. 살아보니 이렇게 사는 게 현명할 듯하단다 정도일 테지요. 어떻게 쓸오랜 시간 고민해 봐야 문장으로 표현될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 뻔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 듯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자식 결혼 축사 쓰는데 은근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살아있다는 증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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