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자유에 의미를 입히는 일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시간에 대한 약속이자 구속이다. 내 시간을 회사의 이익을 위해 오롯이 쓴다는 계약이다. 가정을 돌볼 경제력과 시간을 맞바꾼 것이다. 샛별을 보며 어두운 출근길을 재촉해야 하고 버스를 놓칠까 봐, 전철을 놓칠까 봐 부리나케 뛰기도 한다. 정해진 출근시간에 회사 정문을 통과하기 위한 행위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이고, 회사일에 매진하고 몰입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는 일이다. 그렇게 월화수목금을 보내고 맞이하는 불금과 토요일과 일요일은 해방구가 된다. 늦잠을 잘 수 있는 여유, 밤새 떠들고 술 마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그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다음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풀어짐의 자유다. 휴가라는 시간의 마디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시간에 대한 약속과 구속을 잠시 동료들에게 대신하도록 유예시킨 시공간을 말한다. 동료 간의 협력과 이해가 배경에 깔려있는 것이 휴가라는 시간이다.
직장이라는 곳을, 경제적 충전재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성에 있다.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모인 집단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어야 하기에 그렇다. 그 스트레스와 긴장의 강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으냐가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게 하는 균형추가 된다. 회사의 시간에 몰입되어 번아웃을 경험하게 되면 그 균형추의 무게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는 상태를 '직장을 다닌다'라고 한다.
정년퇴직을 맞은 사람은 이 계약을 공식적으로 해지하게 된다. 시간을 회사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항상 불금이고 항상 토요일이고 항상 일요일이 되었다는 소리다.
퇴직을 앞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허무해하고 우울해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신만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모르거나 주저하기 때문이다. 놀아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집안에 처박혀 데스크톱 컴퓨터만 쳐다보며 유튜브 동영상에 멍하니 빠져있거나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리모컨 배터리만 축내고 있다. 가끔 낮시간에 뒷동산 산책이라도 나가면 남들이 백수로 쳐다보는 것 같아 쭈뼛쭈뼛해진다. 모자도 눌러쓰고 마스크도 해서 못 알아보게 위장을 한다. 점점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줄고 컴퓨터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퇴직을 하면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자신을 위해 오롯이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처럼 시간의 수렁에 빠지면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게 아니고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되고 만다.
'산다는 것'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퇴직하고 산다는 것은 직장이라는 시간의 구속에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행위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뜬다는 의미, 이부자리를 정리하는다는 의미, 샤워를 한다는 의미 등등 회사에 출근하던 시절의 루틴과 똑같은 것들과 다른 것들의 차이가 주는 의미를 찾아내 하나씩 각성하는 일이다. 같은 행위임에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음을 눈치채는 일이다. 그래서 새롭게 시간과 행위에 정의를 내리는 일이다.
이렇게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행위에 정의를 내리다 보면 어떻게 시간을 분류하고 쓸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허송세월이 아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말이다. 바로 놀고 즐길 수 있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되는 일이다. 시간이 갖는 의미를 내 삶에 각인시키는 일, 그것도 긍정과 즐거움으로 치환시키는 일이 바로 호모루덴스가 되는 길이다. 이렇게 시간을 정의 내려놓으면 온갖 것이 할 일이고 온갖 것이 즐거움이 된다. 세상 일이, 시간 보내는 일이 참 쉬워진다.
책상에 책이 쌓여있고 컴퓨터 화면 속에는 무궁무진한 정보와 지혜가 담겨있다. 어떻게 캐낼 것인지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 놀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내공을 키우는 일, 참으로 든든한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바로 목표를 세워 매진하는 일이다. 삶과 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초는 바로 목표를 세웠을 때만이 가능하다. 점령하려는 고지가 없으면 길을 만들 수 없다. 목표가 없으면 등불 없이 산길을 걷는 것과 같다. 너무 단순해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반추해 볼 일이다. 그 속에 길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