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11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오늘은 21일이다. 월급날이다.
현 직장에서 마지막으로 받는 월급이다. 오전 중 통장으로 입금될 것이다. 그것도 한 달 내내 연차휴가를 내고 놀면서 받아보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나게 된다. 놀면서 돈 받는 거, 직장인의 꿈이 아니던가. 요즘 화양연화의 시절을 보내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럼에도 한쪽 가슴이 휑한 기분은 뭘까?
그나마 정년 달이 짝수달인 10월이라, 상여금이 포함되어 월급이 나오는 달이다. 임금피크 마지막 연차에 해당하는지라, 임금피크에 들어서기 5년 전의 반토막이 난 월급이지만 감지덕지, 감사합니다 하고 통장을 확인할 것이다. 이제 현 직장에서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금전적 거래는 오늘로써 종결이다. 아직 퇴직금과 직원 신용협동조합 납입금 정산 등이 있겠지만 별건의 이벤트성 인지라 무시해도 된다. 특히 퇴직금은 이미 5년 전 임금피크 들어갈 때 정산을 했다. 그 이후로는 매년 1년 단위로 퇴직금을 정산해 준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만 55세 자기 생일달부터 임금피크에 들어가는데 그때부터 매년 급여를 10%씩 삭감하는 시스템을 적용한다. 매년 10%씩 줄어드니 정년을 맞은 올해 같은 경우 임금피크 들어가기 전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퇴직금이라고 해봐야 매년 한 달 치 월급 더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 달부터는 국가에선 주는 월급을 9개월 동안 받을 수 있다. 실업급여다. 퇴직하기 전 3개월간 평균 임금의 70%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금액이야 용돈 수준이겠지만 그것조차 쏠쏠하다는 것이 이미 이 길을 걸어갔던 선배들이 주시는 조언이다. 재취업을 하면 그것도 중단되겠지만 그래도 재취업 전까지 실낱같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실업급여를 받다 재취업을 하면 실업급여를 받았던 달 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달 동안 받을 수 있는 금액의 절반을 일시불로 신청해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선배들의 조언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감이 떨어진다.
퇴직급여를 신청하러 근로복지공단에 갈 때는 어떤 심정일까? 쭈뼛쭈뼛 창피할까? 마스크 쓰고 얼굴을 가리고 가게 될까? 직장생활 35년 동안 고용보험금을 냈으니 당당하게 보험금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어깨 굽어 실업급여 신청서를 내밀지 않을까 싶다.
월급.
직장인이 한 달을 꼬박 기다리는 존재다. 세금으로 차 떼고 포 떼고 유리 계좌가 되고 나서도 아파트 중도금 분할 납부라도 있으면 또다시 숫자가 줄고, 지난달 친구 모임에서 호기로 긁어버린 신용카드 명세서 내고 나면 다시 숫자가 더 줄고, 날 추워진다고 백화점에서 카디건 하나 샀는데 그 비용도 빠져나가면 통장 숫자는 다시 달랑달랑해진다. 어떻게 한 달을 버티지 걱정을 하게 되는 패턴의 반복이다. 그나마 그 숫자 속에 개인연금보험으로 빠져나간 숫자가 있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월급날이 있기에 인생의 산소소흡기 역할을 해준 삶의 생명줄이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35년의 '월급'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들어있다. 그나마 내가 다닌 회사는 한 번도 월급을 미루거나 안 준 적이 없다. 감사할 일이다. 되돌아보면 그 험난했던 1997년 IMF 구제금융시절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받았다. 직원들이 고통분담 차원에서 2주일씩 무급휴가를 사용하고 버티기도 했고 그것도 나중에 회사주식으로 되돌려 받기도 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도 한 달씩 돌아가면 유급휴직을 했을 때도 어떻게든 월급은 받았다. 다시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다.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 덕분에 지금 같은 정년퇴직까지 왔다.
월급이라는 단어는 기다림이고 기쁨이고 행복이고 삶의 지킴이였다. 직장인에게 '산다'는 방점의 종결어미가 기승전월급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산다는 것의 기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월급이었다. 그러고 보니 월급을 받기만 했었구나, 누구에게 월급을 줘 보지를 못했구나, 남의 돈 먹기가 쉽지 않음을 평생 경험했지만 그 스트레스를 월급으로 차감해 왔음도 알게 된다. 월급의 액수가 스트레스의 양임도 눈치챈다. 그렇게 직장인으로 받아볼 수 있는 마지막 월급을 받는다. 스트레스도 끝났음을 직감한다.
이제 새로운, 또 다른 스트레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월급과 같은 반대급부도 없는 그런 스트레스. 산 넘어 산일 수 있는 게 인생이지만 그 닥칠 스트레스 산의 높이는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게 다르다. 초원과 같은 대 평원의 탁 트인 스트레스일지, 높다란 에베레스트 같은 스트레스를 만날 것인지는 오로지 내가 판단하고 길을 놓고 만나기 나름이다. 월급 같은 꿀단지가 사라지고 난 다음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고 품위를 지켜낼 것인가? 준비된 자에게는 반가운 일이고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힘든 시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이고 어떤 상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