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 이야기
라디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트위터를 둘러보다 경주 감은사의 가을풍경 사진을 발견하고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넷플릭에서 장율 감독의 영화, ‘경주’(2014)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 줄거리는 “친한 형의 장례식 소식에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은 문득 7년 전 죽은 형과 함께 봤던 춘화 한 장을 떠올려 충동적으로 경주로 향한다. 춘화가 있던 찻집을 찾은 최현은 아름다운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를 만나게 된다.
대뜸 춘화 못 봤냐 물은 최현은 뜻하지 않게 변태로 오인받게 되고, 찻집을 나선 최현은 과거의 애인 여진(윤진서)을 불러 경주로 오게 한다. 반가워하는 최현과는 달리 내내 불안해하던 여진은 곧 돌아가 버린다. 다시 찻집을 찾아온 최현을 지켜보던 윤희는 차츰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7년을 기다린 로맨틱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는 이야기이다.
십 년 전쯤, 그 영화 ‘경주’를 처음 보았지만 그땐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삶과 죽음이 등을 맞대고 서로 경계에 서있는 것이란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내겐 천년의 고도, 경주는 그 이름만으로도 큰 울림이 있는 도시였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수학여행 갈 학년만 되면 이런저런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그 때문에 한 번도 수학여행은 가볼 수 없었다. 그렇게 경주는 늘 내 마음속의 그리움이 되었다.
결혼하고 처음엔 서울의 변두리 아파트에 살았다. 그 동네는 지하철의 종점이었다. 시내중심에 있는 회사에 출근하려면 마을버스와 전철을 타고 동대문 운동장역에서 또다시 갈아타야 했다. 모든 게 결핍이 있었고 다람쥐챗바퀴 같은 생활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때 큰 위로가 되었던 책이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였다. 진보적 시사교양 월간지였던 ‘사회평론’이란 잡지에 유홍준 교수가 썼던 글을 모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라는 이름으로 그 책이 출판되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책 표지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 경주 감은사의 3층 석탑이었다. 그리고, 여름휴가를 내서 천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상승과 안정’의 절묘한 균형미를 갖춘 그 쌍탑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떠났고, 다음날 새벽에 도착했다.
한밤의 고속도를 달린 탓에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감은사와 맞닿아있던 감포바닷가에서 온 가족이 항공사 담요를 깔고 앉아 때아닌 해맞이를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갔고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지난 시절의 추억뿐이다.
늘 삶엔 혼자 감당해야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시간들이 모여서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 그 폐사지엔 두 개의 삼층 석탑, 주변 경계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숲과 늙은 소나무 몇 그루 밖엔 없었고 감은사 앞으로 감포 가는 길이 이어졌다.
그 길 양옆으로 펼쳐진 푸른 논과 그 경계의 논두렁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다시 늦가을이 되면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그 풍경을 보러 온다고 했지만 시절 인연이 닿지 않았고, 그 후 계속 여름에만 몇 번을 더 다녀왔을 뿐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참석하는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린다. 늦가을에는 KTX를 타고 영화처럼 경주역에 내려보고 싶다. 또한, 그 영화 ‘경주’를 다시 보고 조금은 더 그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도 경주는 우리의 삶과 죽음, 인생과 선택이라는 그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늦가을엔 문득 혼자 기차를 타고 경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인생은 결국 혼자 감당하는 시간들이 만든다. 감은사의 폐사지와 삶과 죽음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도시, 그 유적과 박물관, 그리고 그 경주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곳, 그곳이 천년고도 경주이다.
스페인의 투우 경기 중 투우사와 목숨을 건 싸움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성난 황소가 잠시 그 숨을 고르던 곳(케렌시아), 그 쉼터이자 안식처 중의 한 곳이 경주란 도시이고 특히 감은사는 내겐 그런 존재였다.
아마도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을뿐더러,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생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