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밸런스, 그러나 한국 영화 위기의 해답이 될
비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글을 쓸 때는 더 그렇다. 메시지가 어려우면 구성을 쉽게, 메시지가 쉬우면 구성을 참신하게 한다. 사람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은 정해져 있으니 그 용량에 맞추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예술품도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게 된다. 영화 <사바하>는 비율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수백년 동안 이어온, 그리고 수백년 동안 이어질 논란, '신은 있는가. 있다면 왜 고통스러운 자들을 내버려두는가. 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없지만 너무 많은 말이 오고간 주제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바하>는 또 다른 메시지로 이 메시지를 가렸다.
귀신, 즉 악의 존재를 막기 위해 신의 제자가 움직이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제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귀신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처리한다. 뱀의 말은 달콤하기에 마음이 약해지는 상황에서도 신의 지시를 행한다. 교도소에서 자신을 인정해주고 가르침을 주는 박제석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는 네 명의 수감자. 이들은 박제석의 지침을 이행하기 위해 어린 소녀, 약자 중의 약자를 죽이고 반인륜적인 행동을 이어나간다.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악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제거한다. 밤새 불면증에 시달리고 환영을 보지만 신의 가르침을 버릴 수 없다. 나의 아버지, 나의 등대를 위해.
끝은 참혹했다. 신이라 믿던 것이 귀신이었다. 새로운 신의 재림을 막기 위해, 즉 세상의 평화가 아닌 자신의 안위를 위했다. 박제석은 신이 맞았다. 그러나 새로운 신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의 종말과 새로운 신의 재림이라는 순리를 거스르는 순간 귀신이 되었다. 귀신이 된 박제석은 새로운 신을 죽이려 했고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제자는 괴로워한다. 자신이 죽인 아이들 때문이 아니다. 평생 믿어온 것이 무너지며 존재 가치를 잃는다. 그러나 새로운 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그의 힘으로 귀신을 처치한다.
마지막까지 깔끔했다. 새로운 신은 귀신으로 변한 신이 죽자 자신도 생을 마감한다. 새로운 신도 귀신이 되지 않을까 찝찝할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신은 신으로 생을 마감했고, 선과 악의 구도도 확실했다.
이렇게 이해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였다. 과도한 자기 확신으로 아집에 빠져 그릇된 행위를 저지르고 마는 권력자.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대사가 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새로운 신의 말. 제자가 귀신의 지시에 속아 살생을 저질러 온 게 아니라 진정한 신에게 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정말로 신일까. 성탄절이라 즐겁다는 요셉에게 박목사는 말한다.
"요셉아.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날이니? 유대인의 동방박사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듣고 이를 우려한 헤로드왕은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사내아이들을 두살부터 그 밑의 아이까지 모두 학살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하기 위해 수많은 살생이 필요하다면 왜 신이 필요할까. 신은 인간 세상을 보살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신을 정말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기위해 여러 메시지를 지나왔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어려운 메시지는 아니다. 어쨋든 이 메시지에 오기 위한 과정이고 그렇게 낯선 개념도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까. 감독의 욕심에서 비롯된 의미 없는 단서들 때문이다. 구성이 지나치게 어려워졌다. 메시지를 가릴 정도다. 메시지와 구성의 난이도 비율을 맞추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는 날에도 염소들이 미칠듯이 울어댔다.
그날 우리집에도 나와 같이 귀신이 태어났다.
엄마 뱃속에 숨어 있다가 나보다 10분 먼저 태어난 그것은 내 다리를 파먹고 살고 있었다."
영화는 새로운 신의 쌍둥이 동생, 금화의 독백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도입은 전체의 흐름을 결정한다. 미장센의 미학인 영화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도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귀신이 태어나다, 내 다리를 파먹고 살았다.' 이 강렬한 두 메시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신을 귀신이라고 오해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반전을 위한 장치로 괜찮았다. 그런데 왜 새로운 신은 다리를 파먹고 살았을까. 여기에는 어떤 메시지도 없다. 긴장감을 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위치다.
이 외에도 메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긴장감을 주기에는 충분했지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만 써서는 안 되는 장치들이었다. 나중에는 수습해야 할 것들이 산발적으로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의문들, 봉합하지 않고 끝나는 영화는 결말을 결말 같지 않게 만들었다. 과도한 것들을 심어놓고 싹 틔우지 않았다. 분위기를 위한 감독의 욕심은 보는 내내 가졌던 긴장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답이 없는 것들이 있으니 영화에는 계속 의문이 남았고 이들을 처리하느라 메시지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심하게 말하자면 용두사미였다.
언제부턴가 독립영화만 찾아봤다. 블록버스터, 대작들은 뻔해서 보기 싫었다. '남들과 다른 나'를 추구하는 중2병은 아니었다. 너무 지겨웠다. 사람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재밌게 구성하면 뻔해도 즐거움을 얻는다. 그런데 재밌는 구성이 없었다. 나중에 영화를 떠올렸을 때 누구의 영화인지, 심지어 어떤 영화인지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본 장면이 저 영화에 들어가도 무방했다. '감독의 만연필'이라 불리던 영화가 어느새 공산품이 돼 획일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사바하>는 그 자체로 남았다. 감독의 장치와 유머코드, 분위기, 흐름 등 모두가 <사바하>만의 것으로 남았다.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씨네21>의 한 칼럼은 한국 영화에 감독이 사라졌다며 위기로 짚었다. 감독의 역량이 사라지고 흥행의 요소만 남는다는 것이다. <사바하>에는 감독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영화의 위기를 극복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용철 기자는 <사바하>를 보고 '흥미진진함은 좋으나 메워야 할 부분이 많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메워야 할 부분은 많으나 흥미진진함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