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 없는 곳이 필요하다_24.6.10
꾸준함이 성공의 열쇠래도 나는 그냥 내 맘대로 살란다
하찮은 나의 생각은 딱 이 수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이유가 뭘까. 열심의 의도 자체가 이미 불순하다. 순수하지는 않다. 목적을 지니고 있다.
가정에 대한 판타지로 사실 가정을 이뤘다. 판타지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현실적이라고 잘 살까. 그건 또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결핍이 내게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나는 가정에 대한 결핍이 있고, 그래서 가정을 꿈꾼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안학교를 선택했던 이유가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나는 말리고 싶다. 그런 이유로는 오지 마세요. 교육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리고 싶다. 교육의 주체는 결국 가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망각한 채 산다. 내가 그린 이상과 판타지에 시달리며, 현실에 시달리며,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도 희미해져 가며 산다.
왜 난 그동안 시달렸을까?
생각보다 대안학교의 현실이 열악했다. 내부적으로 재정의 열악함보다 인적자원의 열악함이 더 크다. 경력이 있으신 선생님들은 지쳤다. 신입 선생님들은 교내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맞추느라 바쁘다. 내가 쏟아낸 열정만큼 보수가 그렇게 두둑하면 좋으련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어느 정도 알려진 대안학교의 경우, 그리고 신앙이라는 기반 아래 다져진 학교의 경우는 명성이 있다. 그래서 그것 외에는 얻어갈 것이 없다.
너무 적나라한가?
구조적 문제는 더 심각하다. 새로움을 원하지만 새롭지 않다. 참 신기하다.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더 훨씬 멀어지고 있다. 신앙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고, 학교라는 프레임에 갇힌다. 서로가 협력해야 할 관계들이 서로 눈치주고 결과를 도출하길 원하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결국은 직장이지> 라는 결론이 나게 된다. 사명으로 오신 분들도 쉽지 않음을 감지한다. 한마음이 되길 바라나 현실은 자기만의 성을 혹은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느낌이다. 이게 무엇의 문제일까? 신앙은 그런다고 생기는게 아니고, 학교는 그런다고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또다른 하나의 체제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딱 그들만의 리그>
학교의 학부모들은 어떨까? 학교에 협력하기 위해 학교 안팎으로 애쓴다. 재정적으로 구멍 나지 않도록 남편은 돈을 벌고 엄마들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행사, 교육, 참여등을 위해 애를 쓴다. 아이가 2명이든 3명이든 일괄 동일하다. 우리가 바라는 바가 이게 맞나? 우리가 이상하는 바가 이게 맞나? 교육과 신앙이 맞물려 욕심을 한껏 부리다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내 느낌이 맞다면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고민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때는 학교 욕을 했다. 지랄 같다고.
내부에 들어가 일해보니 더 지랄 같다.
학교는 학부모 탓을 하고 있고, 학부모는 학교 탓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 협력적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고 매회차 학부모 교육에 그렇게 말을 해도. 막상 학교 내부로 들어와 보니 업무의 한 일부분처럼 취급되고 있다.
너무 적나라한가. 두렵지 않다. 그게 팩트니까.
나는 그래서 맥주를 깠다. 오늘 분명히 기도했다. 거룩하지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 바른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걸 회개했다. 그런데 회개가 아니었나 보다.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보니 다시 맥이 빠지고, 맥주가 눈에 띄었다.
생각이 깊어진다. 차라리 몰랐다면. 차라리 우둔했다면. 차라리 관심이 없었다면. 배움과 앎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 이런 거다.
학교에서 일할 때 윗사람의 배려가 아니 꼬았다. 무슨 자존심인지 자격지심인지 배려 같지도 않은 배려를 신앙인이라서 배려라는 포장지에 싸서 나에게 던지는 게 불쾌했다. 차라리 배려 없이 욕하면 받아들이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사실 그런 것도 잘 못 받들이는 쫄보이긴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았다. 내가 일을 진짜 못한다. 그때서야 윗분들의 배려가 아니꼽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생각이 든다. 심지어 나는 일을 하면서 학부모들도 이 미숙한 학교를 배려하고 있음을 느낀다. 학교도 학부모를 배려하지만 학부모도 만만치 않게 참고 인내하고 기도함을 느낀다.
그들의 지적을 고깝게 여길 때가 아닌 거다. 사실 지적을 받으면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난 욕을 하며 다음으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무섭도록 중요하다. 이 학교는 공동체라는 상호작용을 하고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옆 사람이 잘되면 좋겠고 가정과 학교와 내가 속한 사회가 잘되길 바라는 것이다.
모르겠다. 남들은 이 모순 같은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는지. 그냥 난 그럼에도 이런 시도가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믿기에. 그리고 나의 오만함과 편견으로 속단하고 싶지 않기에. 그냥 입을 다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