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맞아 미뤄뒀던 대청소를 했다.
세 살 배기 아기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넘어지곤 하는 집들은 거실 매트가 필수다. 형형색색의 매트들이 거실과 부엌, 방들 사이의 복도에까지 촘촘히 깔린 모습은 나의 미의식을 심히 거스른다. 인스타그램 피드 속 호화찬란한, 혹은 ‘모던’하고 ‘심플’한 인테리어들을 보고 나면 한결 더 칙칙해 보인다. 언젠가 아이가 더 이상 뛰다가 넘어지지 않을 즈음이 되면, 혹은 아파트 내 ‘층간소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조심할 때가 되면-그 시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닥 매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단순히 미적인 요소들 때문만은 아니다. 스트레스는 ‘실용’과 가까운 데에서 기인한다. 처음 매트를 깔았을 즈음, 나는 매트 위 먼지만을 청소기로 빨아들였다. 온 바닥을 덮고 있는 매트를 뚫고 먼지나 자잘한 쓰레기들이 바닥에 내려앉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33평 아파트의 거실과 부엌 바닥 청소는 ‘각종 청소도구’라는 현대 문명의 은혜 아래 고작 15분이면 끝나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매트를 들어 바닥을 살펴본 이후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본래 정체가 뭐였는지도 알 수 없으리만치 형형색색 섞여 굴러다니는 과자 부스러기들, 아이 머리를 묶어주는 데 썼던 고무줄들, 잃어버렸던 귀걸이 한 짝들, 모조품 특유의 건조한 빛을 잃지 않은 큐빅들이, 길고 짧은 머리카락들이 그 아래 한데 뭉쳐 숨어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간 내가, 내 남편이, 내 아이가 이 딴 곳에 머무르며 먹고 자고 싸기까지 했다니!
차마 치울 의지조차도 얻지 못하고 소파에 멍하게 앉아있기를 한 시간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에 넣어두었던 테이프 클리너를 다시 꺼내들었다. 온 집안 바닥 먼지와 이물질들을 테이프 클리너로 제거하고, 이제까지 제대로 닦아낸 적 없었던 냉장고와 벽의 틈 사이, 찬장 사이사이까지 물티슈로 꼼꼼히 닦아낸 후 물걸레질까지 했다. 오후 2시쯤 시작한 청소는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날 이후, 보이지 않는 곳들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담벼락에 간간이 뚫린 구멍들을 살펴보며 틈새를 기어 다니는 수많은 종류의 개미들과 마주쳐 혼비백산했다. 사무실의 화장실에 놓인 변기 뚜껑 아래 더덕더덕 붙은 까만 오물들을 마주하고는 소름이 돋아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한창 손가락을 놀리던 노트북 키보드 위를 가만히 살펴보다, 자그마한 곰팡이나 먼지를 발견하고는 충격에 휩싸여 결벽증마냥 물티슈로 박박 닦아내기도 했다.
사소함을 향한 집착은 나의 삶에 피로를 더했다. 동시에 변곡점도 제시했다. 보이는 것들만 대충 보며 넘기던 나의 시야를 확대시킨 것이다. 더 넓게, 더 오래, 더 멀리. 아이와 함께 오후 산책을 할 때마다 우리 모녀를 깜작 놀래키곤 하던 길고양이의 거주지를 발견한 일, 발이라도 달린 것 마냥 아이의 머리를 풀어 내리는 족족 사라지는 알록달록 고무줄들을 매트 아래, 부엌 선반 구석, 그릇 사이사이에서 찾아낸 일, 아이들의 보고서를 첨삭하면서 한컴오피스나 워드패드의 오타 검증 기능도 잡아내지 못한 각종 오타들을 잡아낸 일.
한 경험이 예기치 못한 성장을 불러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설령 불쾌하거나,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더라도 한 계단 오르기 위한 지지대가 되었다면 매우 값진 것이다. 모처럼의 휴일, 주간 행사마냥 거실 바닥에 달라붙은 밥알들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매트 위에 못생긴 데칼코마니들처럼 형형색색 퍼진 크레파스와 싸인펜의 흔적들을 물티슈로 박박 닦아내면서도 더 이상 불쾌하지 않은 것도 성장의 징표라고, 그렇게 이름붙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