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자신의 고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 김훈 『화장』-
편두통을 달고 산다.
가만히 있다가도 무언가가 오른쪽 관자놀이를 꾹꾹 쑤심을 느낀다. 처음에는 눈의 통증인 줄 알았다. 안암 초기 증상, 균형장애, 근긴장이상증…. 눈과 통증을 인터넷에서 함께 검색하면 무서운 이야기들만 난무한다. 눈 마사지도 해 보고, 안과에서 진료도 받아봤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통증에 손을 얼굴로 가져다대다 깨달았다. 나는 지금 눈이 아니라 이마, 그것도 정확히 오른쪽을 짚으려 하고 있음을.
통증의 범위는 광범위하고, 한지를 적시는 먹물처럼 혈관과 살을 타고 사방으로 전염된다. 또한 의외로 통증을 명확히 짚어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다소의 과장이나 각색 정도는 일삼는 듯하다.
두통은 내 모든 사고를 멈춘다. 내 몸이 나에게 내리는 고문 같다. 위나라 조조는 고질적인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진림의 글을 읽으며 정신수양을 하고 파스칼은 두통 덕분에 사이클로이드를 발견했으며, 피카소는 추상미술을 발전시켰다는데 나는 오직 스트레스만을 얻고 있으니, 범인과 초인의 차이는 이런 데에서 오는가 싶다.
나는 두통이 두렵다. 만성빈혈을 달고 살면서 다수의 기절 경험도 있는 나에게 두통은 불길한 전조증상 같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에게 드리우는 ‘어둠의 그림자’, ‘불길한 기운’…. 이런 구절들이 조건반사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내 두려움의 밑바탕에는 유전이라는 과학적 원리가 있다.
…엄마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11살 혹은 12살쯤 되었던 때의 일이다. 엄마는 활달한 사람이었다. 전화기를 붙잡으면 쉬지 않고 떠들기가 국회의원도 능가할 만한 사람이었고, 외국어, 요리 등 배움에 대한 의지도 충만해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바빴다. 빨강머리 앤이 한국에 태어나 어른이 된다면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리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런 엄마가 멍하게 있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처음에는 깊은 상념에 빠져계신 거라 생각했다. 슬픈 소설을 읽거나 멜로 영화를 보고 나서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그 순간만의 감정을 만끽하시던 날들도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뭔가 달랐다. 그리고 소나기를 뚫고 겨우 하교한 날 더욱 명확해졌다. 엄마가 이상하다는 것을.
현관문을 열고 옷깃에 얹은 빗물을 털었다. 신발장 앞에 서 계신 엄마를 보고 나는 역시 엄마와 난 텔레파시가 통한다며, 다리와 발 좀 닦게 수건 하나만 달라고 말씀드렸다. 바람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엄마를 보다가 나는 섬뜩한 기분에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몇 분째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엄마.
나는 엄마를 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부르는 중에도 엄마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엄마의 영혼을 빼앗아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무서워져서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장난치지 말라며 울었다.
“너 왜 이러니…?”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눈을 끔뻑이며 묻자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한테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도저히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종합병원을 방문한 엄마는 결국 며칠 후 입원 절차를 밟았다.
입원 기간에는 외할머니께서 나를 돌보아주셨다. 아빠는 휴가를 내곤 간병에 열중했다. 나와 남동생에게는 걱정 말고, 신경도 쓰지 말라며 입원 병원조차 알려주시지 않았다. 우리 남매는 집과 학교를 오가면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떨쳐내는 데 집중했다. 말이 씨가 될까봐 병과 관련된 불길한 것들은 무엇 하나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평소처럼 활달하고 밝은 모습으로 엄마가 우리 집에 돌아와 주시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또 며칠 후, 아빠가 나와 남동생에게 엄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빠는 그간 조금 낡아 있었다. 나는 퍼석한 얼굴과 흥분된 목소리의 부조화를 느끼며 남동생의 손을 꽉 잡고 차에 올랐다. 차를 타고 난 뒤부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쉴 새 없이 불규칙하게 난장판을 벌이던 내 심장 소리만이 기억난다. 어그러졌던 시간의 흐름, 내 호흡들도.
엄마는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었다. 남동생의 울먹임 사이로 뚜-뚜-규칙적인 기계 소리가 침투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병명이 무엇인지, 수술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 나는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도, 의사도, 간호사도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저 중요한 것은 엄마 머리를 열어 뇌를 건드렸다는 것,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것, 앞으로 수일간의 회복기간을 거쳐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들이었다. 왜 아빠가 우리에게는 엄마의 수술을 말해주지 않았는지, 왜 우리는 몰라야만 했는지, 원망들은 안심이라는 감정에 포슬포슬 녹아들었다. 나는 울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퇴원한 후, 아빠는 우리 남매에게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죄로 엄마에게 두들겨 맞았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엄마 모습은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냐면서. 엄마의 손바닥에 몇 번이고 등짝을 내주면서도 아빠는 허허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남동생도, 그 모습을 보며 마음 놓고 웃었다.
다만 그 후로 우리 가족들은 두통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하필 내가 고질적으로 빈혈을 앓는데다 버스고 지하철이고 걸핏하면 쓰러져댄 전적이 있는 탓에 더욱 그렇다. 엄마나 아빠 앞에서 “아, 머리 아파.”라는 푸념이라도 내뱉은 날엔 바로 다음날 병원에 다녀오라 온 가족이 성화이다. 고통의 공유는 때때로 유대를 낳기도 하는 법, 꽤 포근하고 따뜻한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