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형이 손톱을 깎는 이유는 세련됨이나 고상함을 의심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보상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 안의 그 어떤 고상함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토라지고, 모순적이고, 말이 거의 없는 형. 난 걱정스럽다.
-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 중 -
열 손톱을 살펴보니 멀쩡한 게 하나도 없다. 오른쪽 엄지손톱은 빨간 살점마저 보일 정도로 짧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꼭 눌러볼 때마다 싸한 통증이 밀려온다. 검지와 중지는 더 심각한데, 금이 가 있는데다 속손톱마저 벗겨지기 직전이라 위태롭다. 그나마 새끼손톱이 봐줄 만 하지만 그마저도 거스러미들이 삐쭉삐쭉 솟아 있어 참 못났다. 네일숍에서 관리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양을 다듬자니 길이가 너무 짧아 할 게 없고 알록달록 반짝이는 매니큐어를 발라 꾸며보려 해도 더욱 지저분해 보일 뿐인지라 그만 두었다.
손톱 모양새가 엉망이라는 것이 단순한 심미적 문제만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예기치 못한 불편함을 마주하게 된다. 가령 캔 음료 뚜껑을 따기 힘들다는 것, 나조차 눈치 못 챈 날카로운 부분이 있어 무심코 얼굴을 만지다가 피부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는 것, 바닥에 떨어진 바늘, 연필 심, 클립 등을 한 번에 줍는 게 꽤 어렵다는 것 등이다. 십수년 간 그렇게나 윗니 아랫니로 물어 뜯어댔으니 사실상 자업자득이다만 그럼에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손톱을 물어뜯은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손톱 물어뜯기를 의학 전문용어로 교조증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반복행동장애로 분류되는 것으로 보아 정신병리학적인 질환임에 틀림없다. 자료들을 뒤적여보니 심리적 불안감이나 고민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강박장애로, 손톱 주위의 표피를 물어뜯거나 손거스러미를 벗기는 버릇은 피부 벗기기 장애로까지 분류된단다. 심지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구순기 고착화의 전형적인 유형이 손톱 물어뜯기이며, 구순기 욕망을 잘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안이 손톱과 함께 자라는 모양이다.
과거 한 논문에서 비자살성 자해 심리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난다. 자살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 자해 행위로 자기 몸에 고의적으로 상처를 입힘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특히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공격성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는 데에서는 얼핏 이타적인 행위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결국 자기혐오와 심리적 공격의 수단이 된다는 데에서는 영 불건전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조금 억울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행동장애까지 발현될 만한 심리적 불안이나 고민 따위를 겪은 기억이 없는 탓이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상흔이 있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봐도 영 떠오르는 게 없다. 다만 손톱 상태에 대한 주변의 타박이 많은 탓에 버릇 좀 고쳐보려 하루 종일 껌을 씹어대거나 가짜 손톱까지 붙여 봐도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실낱같은 의지력에 대한 실망만 커질 뿐이다. 뭇 사람들 모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습관이니 어떻게든 아등바등 고쳐보는 수밖에.
손톱들이란, 조그맣고 날카롭기만 한 일시적 소모품 주제에 가지는 의미들 또한 많기도 하다. 일단 여성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부의 상징 중 하나이다. 과거 중국에서는 청나라 시대 여인들이 손가락마다 호갑투를 꽂아 뽐내지 않았던가. 사극에서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저런 손톱으로 어떻게 세수를 하고 물건을 집을 수 있을까 싶어 영 현실성이 없다고 여겼는데, ‘궂은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귀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증표라 하여 괜히 마음이 시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네일숍은 손톱에 각종 반짝이와 스티커를 붙이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다. 금전적 곤란을 겪는 이들조차 네일숍에는 꼬박꼬박 방문한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고단하며 사치품 향유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생활 속에서, 반짝반짝 깨끗하게 빛나는 손톱을 보고 있으면 마치 스스로가 귀하게 대접받는 것만 같아 황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손톱이란, 산업시대 노동자들의 손톱들도 내 것보다야 깨끗할지니 평생 남들에게 귀한 사람이란 인상 줄 일은 없겠거니 싶다.
신체의 일부분이면서도 끊임없이 잘라내야만 한다는 특수성 때문인가. 얽힌 속설들도 꽤나 많다. 한밤중에 손발톱을 깎아 함부로 버리면 이를 쥐가 먹고 사람으로 변한다는 민담은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밤에 손톱을 깎으면 부모님의 임종을 볼 수 없다고 하여 금기시했다. 손톱깎이가 없던 시절 칼과 낫 등으로 손발톱을 잘랐는데, 등불조차 변변찮던 한밤중에는 다칠 위험이 큰 탓에 이를 방지하고자 그랬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페루의 잉카, 터키 등에서도 영혼의 부활을 위해 손톱이 필요하다고 하여 귀하게 보관했다고 하니 동서양 막론하고 손발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음은 분명하다. 신체 부위 중 유일하게 자유자재로 자라며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는 곳인 탓일까.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는 간혹 주역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모습들까지도 종종 보인다.
이토록 신비롭고 고귀한 손톱을 함부로 다루어왔다는 반성도 잠시, 다음 문장을 생각하는 와중에도 거스러미를 잡아 뜯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내게 손톱이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씀은 틀리지 않는다는 산 증명인 듯하다. 심지어는 내 딸도 이 어미의 못된 버릇마저 닮으려는지 다시 입으로 손을 가져다대고 있으니, 작심삼일의 또 다른 증명 사례가 되기 전에 이번에야말로 이 습관을 고쳐보겠다고 무용한 결심을 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