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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Oct 09. 2021

발바닥

내 몸에 대한 도발적이고 발칙한 이야기들

"사마의, 왜 발바닥이 손과 얼굴보다 하얀지 아는가?"

사마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발바닥은 항상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조조와 사마의의 대화 중 발췌 -      



     

발바닥 수술을 받았다.      


발바닥 통증이 너무 심해 구두를 신을 수 없고, 운동화를 신을 때마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절로 비명이 나올 정도였다. 말 그대로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백조왕자』 주인공 엘리제가 쐐기풀 옷을 품에 가득 안은 채 화형대까지 걸어갔던 고통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싶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왼발바닥 중 둘째, 셋째 발가락 바로 아래 커다랗게 자리한 굳은살 때문이다.      


인간에게 걸음이란 본능적인 행동이다. 걷겠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발로부터 시작된 힘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엉덩이를 거쳐 허리까지 오른다. 이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팔로 바닥을 지탱하여 몸을 일으키고 나면, 두 발바닥은 본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일정한 박자로 하나 둘 하나 둘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이 발바닥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노출되면서, 나는 걸음이란 인간의 당연한 권리가 아님을 깨닫는다. 발뒤꿈치로 먼저 땅을 덮은 직후 발바닥 앞쪽으로 바닥과의 접촉면이 옮겨가면 곧바로 둘째, 셋째 발가락 사이 아래 살로부터 엄청난 통증이 몰려온다. 그저 저릿저릿하거나 따가운 수준이 아니다. 순식간에 다량의 전기가 발바닥 앞쪽으로 몰려와버린 것처럼, 발바닥을 넘어 온 몸의 통각을 난타한다. 때로는 끝이 날카로운 말뚝으로 발바닥 앞쪽을 꾸우욱 누르는 듯하다가, 어떨 땐 날카로운 칼로 발바닥을 후벼 파는 것 같다.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산책하는 게 취미인 내게 이는 재앙 그 자체다. 처음엔 그저 굳은살이 두껍게 나서 살이 눌리나보다-지레 생각해 손톱깎이로 굳은살을 잘라내니 그럭저럭 통증도 줄어들고 걷기도 수월했다. 그러나 굳은살은 아무리 잘라내도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은살과 함께 고통도 자라는 듯했다. 잠을 자다 발이 아파 깨는 날들도 있었다. 아파 죽겠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러게 하이힐 좀 그만 신으라니까’라며 혀를 차니 억울함마저 느꼈다.      


결국 병원을 찾으니 중족골통이라는 생소한 병명을 진단한다. 발가락 아래 중족골이라는 부위의 모양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바닥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어 압력을 크게 받는 게 원인이란다. 내 잘못이 아닌 타고난 신체조건 때문이었다니 내심 다행스럽다 싶으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억울해진다. 남들은 할 필요 없는 지출 및 시간 소비가 생겼다는 경제적 한탄, 그리고 내 탓도 아닌 일로 아픈 와중에 조롱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약 1시간가량의 짧은 수술이 끝나고 발을 깁스로 퉁퉁 싸맨다. 목발을 짚고 한 걸음씩 내딛으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남들과 다르게 걷는 데서 느껴지는 뭇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목발 탓인지 시선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절로 숙여 굽어진 허리 때문일 것이다. 동물이란 다리가 많을수록 빨라지기 마련일 텐데, 나는 다리 하나를 더 얻었음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엉금엉금 걷고 있으니 스스로가 꽤 가련하다.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한 것, 그릇인 육체 또한 그런 것이다. 20대의 생기발랄한 살과 뼈, 피부도 시간이 흐를수록 말라비틀어진 채소들처럼 쪼그라들어 간다. 사람의 몸이란 기계와는 달라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품마냥 이것저것 갈아 끼워 새 것처럼 만들 수도 없다. 그저 의학이라는 은총에 의지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부식 시기가 조금이라도 늦춰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이 육체적 절망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목발에 의지하며 천천히 걷다보면 신기하게도 삶의 충만함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아침마다 버스를 잡으러 질주하느라 살펴보지 못했던 주변의 분주함, 달도 아직 잠들지 않은 새벽부터 웃는 얼굴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미소, 목발 때문에 버스에 느릿느릿 탈 수밖에 없는 나를 그 어떤 짜증이나 불만도 없이 웃는 얼굴로 기꺼이 도와주는 행인들의 따스함 같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보고 겪을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많다는 희망의 근거이다. 아프고 고통스러우며 낡고 지쳐갈 때마다 새로운 각도의 시야를 발견한다. 어떤 상항에서도 삶은 계속되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절대자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2주 후 깁스를 풀고 자유인으로서 호모사피엔스의 본능을 실컷 발현하는 중이다. 그러나 살아가며 계속 걷고 달리며 발바닥을 혹사시켜야만 하는 이상 완치는 없는바, 내 발바닥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사실 내 몸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큰 소리로 째깍째깍 경고음을 울린다. 어차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라면, 다가올지도 모르는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함에 불쾌해하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통한 성장을 기대하는 게 낫다. 그렇게 사람들은 깨지고 아파하고 실컷 두려워하다가 끝내 삶에 무던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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