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름 Jan 14. 2023

삶에 경쾌한 리듬을 입히다

어쿠스틱 라이프(2010)/난다/카카오웹툰

사람은 누구나 평생 동안 몸과 마음의 부조화를 겪는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몸이 따라주지 않거나, 몸이 원하는 바가 명확히 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거나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온다. 분노, 우울, 짜증, 자조……. 그렇게 나쁜 기분에 빠지고 나면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 모양새이니까 화풀이로 누군갈 원망할 수도 없다. 그럴 때 '어쿠스틱 라이프' 속 캐릭터 난다의 대처를 보면 어느 정도 해법이 보인다. 작가는 몸의 편도 마음의 편도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진행 상황을 관찰하다가 적절히 대처해나가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둘 사이 대립각이 무뎌져 있다. 그렇게 작가는 '나'의 평화를 지켜나간다.


핵심은 공평한 중재다. 몸이 신호를 보내면 무시하지 않고 게으른 마음을 슬쩍 채근했다가, 마음이 지친 기색이 보이면 몸에게 가서 스윽 협조 공문을 보낸다. 예컨대 양쪽의 입장을 각자에게 잘 설득시킨다. 상황에 맞는 최선책은 찾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규칙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그 순간을 잘 넘어간다. 그녀의 이러한 야무진 협상 능력은 일상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난 덕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나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나의 일을 일정 부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태도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다. 방관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필요한 진지함을 버리라는 뜻이다. 삶이라는 망망대해 같은 시간도 크게 보면 도식화해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위기라는 파도에서 일찍 벗어나게 된다.


기본적으로 난다 작가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관찰의 대상은 남과 자신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하여 위기에 봉착했을 때 꼭 줄을 섰다가 자기 차례를 맞이한 듯 크게 허둥대지 않는다. 모두가 겪는 문제인 것도 알고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닥칠 문제라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보단 번호표를 손에 쥐었다는 상상 아래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게 위기 자체의 심각도를 낮춰줄 순 없어도 난데없는 공격을 받고 벌렁거리는 심장이 진정되는 시간은 줄여줄 테니까.


작가는 자신이 맞장구에 재능이 없다고 말한다. 다정한 위로, 상냥한 조언, 따스한 공감보다는 무관심과 냉철한 평가로 대답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하지만 작가가 누구보다 귀 기울이고 일일이 반응해주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작가 자신이다. 작품 속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작가가 사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일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루 중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꼭꼭 챙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답은 앞서 언급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작가는 오늘 뭘 했는지 기억하는 게 아니라 뭘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기억한다. 아주 작은 감상이라도 놓치지 않고 언어로 저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시로 변하는 감정을 하나하나 명명하고 갈무리하다 보면 행복을 감지하는 수용체는 훨씬 예민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행복이란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감정이다. 반드시 변화라는 현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작지만 잦은 행복감은 장기적으로 인생을 낙관하는 힘을 길러준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에 균열이 생겨 무력감이라는 세균이 침투하려 할 때마다 시시한 듯 웃음으로 상처를 봉합해버린다.


작품을 읽다 보면 '시절' 이란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시절의 첫 번째 뜻은 '일정한 시기나 때'이다. '일정'이란 '분량'과 '순서'를 전제로 한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인생이 시절로 구분된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지금의 고민이나 괴로움이 언젠간 끝난다고 예고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그다음 더 큰 고난이 닥칠 걸 경고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시절의 힘을 믿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선 장난기에 가려진 의젓함을 설명할 수 없다.


시절이라는 헐렁한 구분 안에서 세부적인 구성을 어떻게 채워가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작가의 경우, 그 안을 매우 촘촘한 단계로 꽉 채워 넣었다. 그냥 지나칠 법한 일에도 '성장'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풍경의 변화가 전혀 없는 평지만 한참 동안 걷는 것과, 낮은 계단을 차곡차곡 오르며 때때로 달라진 경치를 바라보는 것의 차이는 마음가짐 또한 달라지게 만든다. 후자의 성과란, 삶의 의욕이나 자기만족으로 포장할 수도 있지만,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재미다. 살아갈 맛이 난다. 때때로 불안함과 우울함에 빠지더라도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만 있다면 활력을 되찾는 건 꽤 쉬운 일이다.


머리를 감고 나서 가르마를 타는 난다를 보며 남편 한군이 묻는다. "너 머리 감고 가르마 자연스럽게 내버려 뒀던 게 아니었어?" 다른 사람 눈에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비밀스러운 수고와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작가는 꼭 짚어준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과 스몰토크를 나누는 것, 누군가의 말에 적절히 호응해주는 것, 얇은 바지 아래 속옷을 신경 써서 골라 입는 것 등 일상에 덜컹거리는 부분이 없도록 신경 쓰는 노고는 오로지 나만 아는 것이다. 은근히 기운은 기운대로 쓰고 딱히 큰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사회적 인간들'에게 필요한 건 그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나도 안다는 무심한 듯 다정한 누군가의 고백이다.


독자들이 난다의 일상에서 기대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법이 아니다. 흔들렸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그때마다 난다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과정에서 가족의 역할이 눈에 띈다. 늘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힘을 써왔던 난다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관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애정이 듬뿍 담긴 관찰이다. 남편인 한군에게는 그것이 놀림으로 나타나고 자식인 쌀이의 경우에는 애착으로 드러난다.


작가는 육아를 하면서 연애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작업실을 공유하는 남편에게는 동지 의식을 느낀다고도 했다. 아이가 조금 자란 후 작가는 친구가 생긴 것처럼 묘사했고 남편과 밤늦게 캔맥주를 마실 때는 의지할 수 있는 반려자를 느꼈다. 그녀의 가족이 평범한 듯 특별한 분위기를 띠는 건 남편은 남편, 엄마는 엄마, 아이는 아이로서만 대우받지 않고 또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관계를 규정하며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그 안에 가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예를 들어 연애 감정은 연인에게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관계가 정해졌다고 해서 그 속성에 해당하는 고정된 감정을 공급받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어긋난 연인 관계는 복종이나 집착의 형태로 변형되어 공포나 고통을 발생시킨다. 관계가 구속이 아닌 울타리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늘 거울을 들고 상대를 비춰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각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모습처럼 매번 새로운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고 수용하는 태도만이 건강한 관계를 지속시킨다. 관계의 궁극적인 가치는 상대를 통해 나의 새로운 면모를 깨달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작가의 내면이 튼튼할 거라는 인상이 괜히 드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나는 A다'라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a는 아니다. 나는 b는 아니다. 나는 c는 아니다…….' 하는 식으로 답의 범위를 점점 좁혀나간다. 그리고 예측이 어긋난다고 해도 오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금방 다음 예측으로 넘어간다. 사는 게 복잡하고 피곤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걸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나를 어떤 기준에 맞추는 것을 매우 귀찮아하는 태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에 더 너그러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합리화란 게 비굴한 변명이나 의지박약, 무책임의 증명이 아니라 나를 나와 화해시키는 생존 능력이라고 보면 어떨까. 그런 인식을 품고 산다면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더라도 그리 어지럽지는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는 왜 웃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