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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18. 2024

#4. 마스크 손님

    마트 계산대에서 손님에게 꼭 묻는 정보가 있으니 바로 회원 번호이다. 내가 일하던 마트도 동네 장사라 약 97퍼센트 손님들이 단골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원 번호라 함은 등록된 전화번호의 뒷 네 자리인데 이 숫자 네 개가 사람 신경을 참 곤두세웠다. 생각보다 숫자를 명확하게 발음하는 손님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많지 않은 게 아니라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손님, 스치듯 재빨리 발음하는 손님, 부정확한 발음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손님, 자기 할 일 하느라 내 말을 무시하는 손님까지 단순한 절차이지만 소심해서 되묻기도 부담스러운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들리는 대로 번호를 입력했다가 다른 회원 포인트로 적립한 적이 있다. 카드 결제는 0.5퍼센트, 현금 결제는 1퍼센트라는 미미한 적립률이지만 손님에게 무척 미안했다. 그 이후 나는 실수를 줄이고자 손님이 불러 주신 번호를 일부러 따라 말하며 키패드를 누르거나 검색된 회원 이름이 맞는지 꼭 되물었다. 혹시나 내가 다른 이름을 대면 어떤 손님은 곧바로 쏘아대며 다시 번호를 불렀는데 문제는 그렇게 다시 알려줘도 여전히 발음은 불명확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세상에 아나운서처럼 표준 발음법을 지키는 한국어 화자가 얼마나 된다고, 손님들의 발음을 원망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내가 남들보다 발음 인지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특정 음역대의 목소리는 유난히 잘 들리고 어떤 목소리는 지독히도 안 들리는 게 사실이었다. 분명 같은 크기로 말하는데도 그렇더라. 어쨌든 이렇다 보니 나로서는 손님이 말할 때 입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울까 봐 끝까지 못 보고 고개를 돌리기가 부지기수지만 어떻게든 민망함을 이겨내고 손님의 입술을 읽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방법에 큰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마스크다. 코로나 대유행이 지나간 이후로도 몇몇 분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셨는데 아무래도 그런 분들은 말소리가 더 뭉개졌다. 입술을 전혀 읽을 수 없으니 그런 분들이 말씀하실 땐 자동으로 몸이 손님쪽으로 기울어졌다. 혹시나 내 행동이 좀 과해 보일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마트 환경을 한 번 되짚어보자. 심장이 절로 빨라지는 신나는 유행가가 쉴 새없이 흘러나오고, 계산대에 몰린 손님들은 너도나도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파격 세일 시간대에 걸리면 정육이나 수산, 청과 쪽에서 마이크를 찬 직원이 쩌렁쩌렁 홍보 멘트를 날린다. 이러니 숫자 네 자리 알아듣는데 진땀을 뺄 수밖에.


    내 경험상 마트에서 일하는 게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쉬웠는데 딱 하나, 마트가 훨씬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도 제대로 못 알아듣냐?'라고 나무라는 듯한 손님들의 따가운 눈빛이었다. 심지어 손님이 대여섯 번을 말하고 나서야 겨우 번호를 알아들은 적도 있다. 그 손님이 마스크를 쓴 데다 유독 새는 발음이라 알아듣기 힘들기도 했지만 점점 격앙되는 손님의 목소리에 위축되어 귓구멍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았다. 유사시 마스크만큼 상대를 배려하는 위생적이긴 도구가 없긴 하나, 이런 불편을 야기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끔은 내 얼굴에 침을 튀겨도 좋으니 그냥 마스크를 벗고 또박또박 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경험이 곧 배짱이라고, 손님들이 말하는 방식에 적응하면서 내 소통 능력도 한층 발전했다. 처음엔 표준에 매우 가까운 발음만 한 번에 알아들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가 점점 늘어나 발음이 부정확해도 손님이 의도하는 바가 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또한 국어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나이와 성별마다 초분절적 요소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듣기에 혼란을 일으키는 음운론적 환경이 어떤 것인지 등 다양한 표본을 구할 수 있어서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나만의 즐거움으로 이겨냈다. 하지만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분명하고 깔끔한 발음으로 말씀해주시는 손님이 가장 반가운 건 변하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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