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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Jun 25. 2024


#3. 반말하는 계산원

    어딜 가든 마트 계산원은 기혼 여성이 많은 편이다. 내가 일하던 마트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빼고는 모두 가정을 꾸린 분들이었고 어리면 유치원생 크면 30대인 자녀가 있었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는 게 다들 가정에서 가사일을 도맡아 하는 분들이라 자연스럽게 손님들과 살림 이야기를 했다. 돌김과 곱창김과 재래김의 차이점이라든지, 얼갈이 김치를 담그는 법이라든지, 매일 배달음식과 간편식품을 사먹는 나로서는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이야기가 편한 말투로 오갔다. 그런 걸 보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 듣고 '저래도 되나' 깜짝 놀랐던 점이 있다. 바로 반말이었다. 나는 나이, 성별 불문하고 모두 손님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썼는데 다른 분들은 연세가 많은 분들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편하게 부르면서 친근하게 반말을 섞어 썼다. "아버님, 그건 다 올릴 필요 없어. 하나만 줘." "아까 보니까 잔돈 있더만. 그거랑 포인트로 계산하면 되지." 이걸 손님이 친근감의 표시로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역시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마음일 순 없는 노릇이었나보다. 안 그래도 말투가 조금 공격적이고 성격이 드센 직원이 반말을 써 버리니 참다 못한 어떤 손님이 왜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지적했고 직원은 거꾸로 손님이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해서 아슬아슬한 기싸움이 펼쳐졌다.


    여자저차 잘 넘어간 뒤 직원 분은 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도통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 분의 원래 성격을 잘 알기에 왜 억울해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겉으로 그 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같이 손님을 욕했지만 속으로는 손님이 과민 반응했다는 데에 섣불리 동조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직원과 친해지기 전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그치는 듯한 말투도 말투지만 서너 번 본 사이에 사적인 영역을 사정없이 찌르는 질문이 무척 불편했다. "지금까지 돈 얼마나 모았어?", "너 몸무게 몇이야?", "남자친구 사귀어 본 적은 있지?" 등 대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번번히 억지 웃음으로 대꾸하고 넘어갔다. 


    처음엔 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했더니 아니었다. 손님에게도 서슴없이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생김새가 이국적인 분들이 오시면 "어느 나라? 스리랑카? 거기가 어디데? (날 보며) 너 스리랑카가 어딘 줄 알아?"라고 툭툭 내뱉고 혼혈 아이가 오면 "엄마랑 아빠 중 누가 한국 사람이야? 밑에 또 동생 있어?"라고 묻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고기와 숯, 맥주 따위를 사가는 손님을 보면 "어디로 놀러가요? 지난 주엔 여수 갔다왔다며."라고 아는 체를 했고 새로 나온 라면을 사가는 분을 만나면 "이거 맛있어요? 맛있으면 나도 먹어보게."라고 넉살을 떨었다.


    이걸 꼭 무례하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게 이런 붙임성을 좋게 보는 손님이 꽤 된다. 실제로 여러 손님이 집에서 직접 만든 김치, 김밥, 튀김, 떡 등을 그 직원에게만 챙겨줬다. 내 영역과 남의 영역 사이 구분이 명확한 나 로서는 손님과 그 정도로 친분을 쌓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관계를 처음엔 신기하게만 바라봤지만 같이 일하다 보니 점점 배울 점이 보였다. 예를 들어서 어떤 손님이 만두를 같은 종류로만 사가셨다. 그 직원은 "왜 이것만 드세요?"하고 물었고 손님은 돼지고기를 못 먹어서 채소와 두부만 들어간 걸로 사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직원은 "이것 말고도 채식 만두 많아요!"라며 안타까워했고 직접 냉동고까지 가서 대체육이 들어간 만두 종류를 일일이 알려줬다. 거기다 자신이 먹어본 만두 중 가장 피가 쫄깃하고 맛도 좋은 제품을 손수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손님은 "아이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내내 저것만 먹었네."하며 허허 웃으셨다.


    그걸 보니 내가 너무 인간성 없이 계산만 하는 계산원은 아니었나 반성하게 되었다. 손님들이 뭘 사가든 함부로 아는 체를 하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냥 모르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은 차가운 속내에서 발현된 태도는 아니었나 싶다. 장보는 목록만 봐도 한 사람의 취향과 식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인데, 그걸 여러 번 계산하면 내적 친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왜 정해진 말 말고는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을까. 그깟 친절한 말투만 장착한다고 손님들이 편하게 느끼는 건 아니었을 텐데. 수십 번 만난 손님도 어떻게든 안면을 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한 번은 손님이 계산대로 오는데 퇴근 시각이 가까워진 그 직원이 "나한테 오지 마라."하고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진짜 손님이 그 직원의 계산대를 피해 내 쪽으로 왔다. 그 직원은 웃으면서 "들으셨어요?" 라고 물었고 손님은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따라 웃으셨다. 나는 손님을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어디든 사람 사는 세상이고 우리네 삶은 작정하고 삐뚤게 보지 않는 이상 대부분 서로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장면으로 가득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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