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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Jun 13. 2024

#2. 친절한 계산원

    어느 날 새벽 네 시 좀 넘어서 편의점에 갔는데 무척 공손한 말씨를 쓰는 알바생을 만났다. 5성 호텔이나(가본 적 없다) 백화점 VIP 라운지(역시 가본 적 없다)에서나 마주칠 법한 깍듯이 예의를 갖춘 말씨였다. 내가 내민 멤버십 바코드를 찍을 땐 핸드스캐너에 두 손을 갖다 대었으며, 본인의 일이 끝난 뒤에는 내가 계산대를 떠나기 전까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자세로 대기했다. 이 무슨 서비스 교육 영상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물론 내가 목격한 그 친절에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있었다. 바로 알바생이 초보라는 것. 처음 낯선 일을 배우게 되면 근무 시간 내내 긴장을 풀 수 없고 손님이 들어오기만 해도 자세가 바로잡힌다. 내가 만난 그 알바생도 말씨는 분명 사근사근했지만 분할 결제나 기프티콘 결제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미숙함으로 결제를 다시 처음부터 진행할 때 친절도는 한결 높아졌고 내가 가져가기 쉽게 물건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는 손길을 보니 아직 손님을 많이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와 편하게 대화하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대외용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처럼 가끔 친절함은 일과 낯가림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솔직히 나만 하더라도 편의점 알바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무뚝뚝한 알바생이 되어갔다. 뒤돌아서면 어질러져 있는 식음대, 돈이나 카드를 던지거나 대뜸 반말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손님들, CCTV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장님, 자신의 일을 나에게 떠넘기는 다른 알바생까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친절하고픈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러다 하루는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지 한 마디도 안 하는 알바생을 마주했다. 짜증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에, 계산하는 동작에는 귀찮음이 한가득 묻어났다. 같은 알바생으로서 그를 이해해 보려고 했지만 괜히 내가 그의 눈치를 보게 됐다. 가격표가 없는 상품이 얼만지 물어보는 것도 미안해서 망설이다가 포기했고 멤버십 바코드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어플이 잘 실행되지 않아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굉장히 큰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았다. 편의점을 나오고 나서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쩔쩔맸지?' 싶으면서 아차, 싶었다.


    나 또한 이전 손님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다음 손님을 맞이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손님을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며 차가운 말씨로 응대한 적이 있었다. 그 손님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새 손님은 새 기분으로 맞이했어야 했는데. 여기서 또 한 번 느끼지만 역시 역지사지만큼 좋은 배움이 없다. 내 행동을 되돌아볼수록 부끄러워지는 게,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무례하다는 걸 몇 번 경험하고서 앞으로 친절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다짐을 한 적도 있다. 미숙함 때문에 애꿎은 손님들만 친절을 빼앗긴 셈이다.


    당연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내공이 쌓일 만큼 쌓여 여유로 친절을 빚어내는 계산원도 있다. 찰나의 눈길에도 손님 상대하는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뿐 아니라 일 자체가 멋있는 일로 보인다. 일상 속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친절한 말 한 마디로 누군가의 기분을 바꿔놓는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도 누군가에게 계산원이 하찮고 지루한 직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 속 한 장면을 웃는 얼굴로 장식하는 멋진 직업이라는 걸 알려주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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