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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Feb 04. 2020

두 번째가 아쉬운 이유

영화 <겨울왕국 2>

뭘 기대했는가


 첫 키스, 첫 섹스.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설렌다. 실제로 하는 것 보다도, 생각하는 게 더 설레기도 한다. 겨울왕국 첫 번째 이야기는(이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줄 알았지) 우리에게 그런 설렘으로 다가왔었다. 기대치 않았던 대박이 터지고, 바로 두 번째를 준비하던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설렘이었을까, 부담이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관객들의 기대감은 이미 상승세였다. <겨울왕국>은 어느 정도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영화다. 최근 몇 년간 디즈니는 이전의 그들이 보여줬던 성차별적 인식을 뒤바꾸기 위한 굳은 결의를 보여주었다. 주인공들은 연애나 결혼이 아닌, 자아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며, 능동적인 태도로 임한다. 디즈니 고전 시리즈부터 섭렵했던 필자는 2D 시리즈의 질감을 사랑하긴 하지만, 인종 및 성차별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금의 디즈니가 싫지는 않다. 다만, 과연 겨울왕국은 두 번째를 맞아야만 했는가. 그리고 이게 정말, 재밌는 영화가 맞는가. 두 화두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잠시 숨을 고르며, 못 본 독자를 위한 간단한 줄거리 요약에 들어가겠다.


세 줄 요약


 아렌델에 돌아온 엘사, 성은 평화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엘사는 어딘가 불안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왕으로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고 숲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의 말씀을 떠올린 엘사는 숲의 정령을 찾으러 떠나고, 안나는 또다시 모험을 떠난 엘사를 찾으러 간다.


 제작진들은 그리 반기지 않겠지만 1편과 비교하자면 2편은 어둡고 불안한 분위기가 많이 드러나는 편이다. 우선 채도 자체가 밝지 않고, 어딘가 음산함을 풍기는 숲의 노랫소리는 마음 약한 아이들로 하여금 눈물짓게 했다. 전작이 '따뜻한 눈(snow)' 혹은 '반짝이는 눈(snow)'을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보다 '차갑고 뾰족한 눈(snow)'의 면모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왜 겨울에 개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조연 캐릭터들로 웃음을 자아내는 디즈니의 공식을 철저히 지킨 게 1편이었다면, 2편은 그들의 비중은 확연히 줄고 대신 두 주인공의 성장 서사가 주로 다뤄졌다. 물론 그들을 위한 테마곡도 존재했지만, 이야기 흐름에 방해만 될 뿐 재미도 감동도 잡지 못했다. 생각보다 볼 건 없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주인공들을 향한 애정에만 의지를 보태 2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플롯과 디테일이 많이 약하다. 예정되지 않은 영화를 덮어놓고 낳아버린 티를 너무 내는 이야기였다.


 이건 비단 겨울왕국 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먹왕 랄프 2>가 개봉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인크레더블 2>와 <토이스토리 4>는 재밌었는가? 단순히 상업성이 짙어졌기 때문에 재미가 떨어졌다고 말하긴 힘들다. 태초부터 디즈니는 상업성을 기반으로 한 회사였고,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라는 명성에 걸맞은 기술적 성과와 상업적 성과는 물론 예술적 성과까지 모두 갖춘 사기캐였다. 뭐가 달라졌을까? 기존의 디즈니 고전 시리즈를 보자. 동화에 뿌리를 두되 좀 더 전형화될 수 있도록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조연들로 웃음을 자아내며, 노래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백설공주 이야기는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디즈니를 본 이후의 세대는 백설공주의 파란 퍼프소매와 노란 치마를 기억한다. 그가 우물 속 자신을 보며 사랑 노래를 부르던 장면을 기억한다. 파이 끝을 자르고 동물들과 함께 난쟁이의 방을 청소하던 그를 기억한다. 디즈니는 이야기뿐 아니라 전체 영화의 특색을 기획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무적의 부대였다. 3D로 넘어온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엘사와 안나가 평소에 입는 옷 스타일과 노래 정도는 기억하지만 모든 장면이 아름다웠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뀐 것도, 콘텐츠의 휘발성이 강해진 것도 한몫하기는 했다. 그러나 디즈니가 몰락해 버리고, 픽사까지 함께 끌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기는 하다. 그건 그들이 여전히 디즈니이기 때문이다.


재미없다. 페미니즘 영화라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정말 페미니즘 영화는 맞을까? 사실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 시리즈 이후로 쭉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뤄왔다. 다루는 모습에서 약간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한다. 백설공주가 왕자의 키스로 눈을 뜨고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보는 아이들과, 엘사가 제일 일 순위인 안나와 그런 안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결혼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크리스토프를 보는 아이들의 인식 차이는 꽤나 거대할 것이다. 게다가 엘사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지 않는가? 비록 드레스를 입고 있긴 하지만 파란색이라니, 엄청난 변화이다. (농담이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2시간 동안 꾸역꾸역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진짜 재미없네. 언제까지 봐야 됨. 근데 인종 문제도 그렇고 성 차별 문제도 그렇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긴 했네. 그렇다고 재미없는데 계속 봐야 되나? 내가 지금 페미니스트라고 재미없어도 꾸역꾸역 보라고 계속 수혈하듯 저러는 건가? 선심 쓰는 거야 뭐야. 누가 만들어 달랬나.' 내가 지독히도 네거티브negative한 사람이라는 걸 미리 언질 하는 걸 잊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좀 부정적이고 입맛에 안 맞는 것에 비난을 퍼붓는 편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 종종 이런 식의 혼동이 생기곤 한다. 진짜로 재미없는데, 이 영화가 특정 사상을 지지하거나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 짧은 인생, 재밌는 영화는 언제 보지.


  페미니즘 영화는 계속 태어나야 한다. 페미니즘 영화는 소비되어야 하고, 많은 파이를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재미없으니, 페미니즘 영화는 재미없다! 정도의 얄팍한 인식은 거둬주었으면 한다. 내가 원래 부정적인 거랑, 페미니스트인 거랑 별개인 것처럼 이 영화도 그런 거다. 그들이 사상을 위해 영화를 만들든 돈을 위해 사상을 이용하든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물론 픽사도 먹고, 그냥 온갖 걸 다 포식한 뒤 자기들 스트리밍 사이트를 만들려는(심지어 넷플릭스에서 프렌즈도 앗아가 버리려는) 디즈니의 심보로 미뤄 보았을 때 유추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사상가들을 자극한다면 얼마든지 자극당해줄 수 있다. 다만 좀 잘했으면 좋겠다. 제발 재밌게. 아 좀 보다가 신경질 나지 않을 정도로만. 제발 부탁이다.


애매한 결론


 결론은... 픽사 초기 영화 나올 때 나는 정말 행복했구나... 디즈니 고전 섭렵할 때 정말 즐거웠구나... 지브리... (NO JAPAN)...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장르화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장르라는 이름으로 묶기엔 애니메이션은 너무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사 영화보다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만든 이의 알맹이가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며, 장단점이 극명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믿고 거르게 만들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산업은 또다시 과도기에 접어들고 있다. 월트 디즈니가, 존 라세터와 스티브 잡스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초창기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비단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그들이 하는 무모한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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