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
가장 처음 한 배신을 기억하는가?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유일하게 우정을 나누던 친구였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쭈꾸미라는 별명을 붙였고 만화를 좋아했으며 서로 밖에 알지 못했다. 그와 나는 서서히 멀어졌다. 내가 그 애를 '오타쿠'라고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현재의 나는 그때 이후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미루다 '우리들'을 봤다. 원래 나는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보는, 지독한 '논-스포 주의자'였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거의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방구석 1 열이라고 내가 사랑하는 프로그램에서 심도 있게 다루기 때문에... 강제 스포.) 아이들 연기가 끝내주고 조금은 뻔하지만 따뜻한 이야기. 그렇지만 좀처럼 땡기지는 않는 맛이었다. 오래 돌아서 나는 이 앞에, 어린 배신자의 앞에 와있다.
반에서 '은따'를 맡고 있는 선은 피구 시합에서 늘 깍두기다. 그런 선이에게 전학생, 새로운 친구, 지아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방학 내내 깊은 우정을 쌓지만 지아가 학원에 다니면서, 개학을 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된다. 전 학교에서처럼 왕따 당하고 싶지 않은 지아와, 또 혼자가 될 것이 두려운 선의 갈등은 깊어진다.
이야기는 두 아이의 갈등과, 사건에 조금씩 발이 엮여있는 주변 친구들, 부모님을 통해 드러난다. 특별한 장치의 도움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꾸려가는 모습은, 그 시절처럼 순진하달까, 혹은 관조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이 영화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비슷한 영화인 단편 <콩나물>이 아이의 시선에서 본 세상의 특별한 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아이가 겪는 촘촘한 인생의 굴레, 아이러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아이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선은 자기가 어떻게 왕따가 되었는지, 왜 지아가 자신을 배신하는지 알지 못한다. 진짜 세상에서 대부분의 일이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띄지 않은 채 발생하는 것과 같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차마 눈치채지 못하는 부분을 목격하는 방식으로서 인과성과 현실성을 얻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간다.
내가 한국 영화를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 감정의 촘촘하고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들은 뭐랄까, 굉장히 작은 표정 변화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는 컷을 많이 활용하는데, 첫 장면에서 선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좋은 듯, 선택되지 않음에 실망한 듯, 애매하게 웃는 표정의 주인공은 단숨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싫어하거나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지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세상은, 하루하루 새롭고 치열하며 지루할 틈이 없는 곳이다. 어린 시절 시간이 너무 안 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을 인식하는 그들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 실제로 영화의 앵글이 굉장히 낮게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들은 아무 의도도 없이 배신을 저지른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변명 같은 말들이 아이들에게는 진실이다. 극이 진행되고 배신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우리는 저들이 왜 저래야만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잘못은 어른도 저지르지 않는가. 애들이 들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를 하고, 본인의 상황이 먼저라서 애들의 의견을 무시했던 아주 사소한 부모들의 잘못 역시 이 영화에 등장한다. 우리는 그들의 상황은 쉽게 이해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군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그런 모순적인 점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인간사의 굴레에 관한 통찰력을 획득한다.
그 친구 지금은 어떻게 살까. 가끔 내 생각은 할까? 나와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는 있을까? 그때의 일에 대해 어떤 얘길 해줄까. 아마 모든 걸 용서하거나, 높은 확률로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친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히 큰, 아주 거대하게 불어난 죄책감은 아니었다. 대신에, 그것은 입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처럼 어쩌다 한 번 아주 신경이 쓰였다. 이후에도 나는 수많은 배신을 저질렀고 죄책감 따윈 갖지 않았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라고 자위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치만,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사실은 작년에도 나는 또 다른 배신을 저질렀다.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 만난 친구들이었고, 곤고한 관계를 쌓아나갔지만,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건 싫었다. 기대도 안 되는 여행을 함께 가긴 싫었다. 나는 진실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친구를 배신했다. 죄스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신경이 쓰일지, 얼마나 거슬릴지는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한없이 좋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 난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걔가 내가 좋다니까, 마다할 이유는 없고, 겸사겸사 외롭기도 하고. 그런데도 영 땡기지 않는다. 그 애에겐 올 듯 말 듯하는 내가 배신자겠지. 또 어떤 때는, 누가 내 맘을 안 받아줘서 아주 죽겠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좋다고 말하는데도 내가 싫다는데, 왜지? 내가 못났나? 내가 이기적인 게 티 나나? 아무리 졸라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애를 생각하면 나는 내 주위 10km 이내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피해자가 된 기분이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배신자로,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피해자로 남기도 한다. 그렇지만 입장이라는 건 상대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뀐다. 내가 그때 배신했으니, 배신당해도 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는가. 내가 한 배신은 그럴듯하고, 내가 당한 배신은 아프고 쓰린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게 바로 이 '순전한 사랑'이라는 건데, 이 이야기가 순전함으로 점철되는 건 가장 마지막, 막내의 대사로부터다.
그럼 우린 언제 놀아?
걔가 좋고 걔랑 노는 게 좋으니까 좀 쓰라려도 먹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순전한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는 좀 순전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순간 그럴 필요는 없다. 기왕이면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면 좀 사소한 순간에라도 한 번쯤은 순전히, 그를 사랑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순전한 사랑을 배우고 또 잊고, 또 상기할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또 어떤 순간에, '난 충분히 사랑했으니 아쉽지 않아'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주고 나면, 배신당해도, 전처럼 아프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난 그랬다.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초반에 썼지만, 사실은 그렇게 싫어하진 않는다. 난 무엇보다 내 행동을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다들 그렇게 스스로의 잘못을 치유하고 있지 않은가. 뭐 조금 엉망으로 살아도, 행복하면 그뿐이다.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배신자가 되고 또 배신에 파묻혀 살면서 세상을 조금씩 더 네거티브negative하게 만들고 있더라도, 걔네가 행복하다면 그대로 두고 싶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유투버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드나요? 머무세요. 마음이 들지 않나요? 움직이세요. 당신은 배신자, 혹은 피해자로서,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