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
넷플릭스에서 만든 영화 및 드라마에 관한 편견이 있었다. 지금도 유효하나 근거는 미약한 이것은 바로 '재미없다' 였는데, 사실 아직 유효한 것이기도 하다. 이 편견은 '버드 박스'를 거치며 곤고해졌고 '엘리트들'을 거쳐 조금 허물어졌으며 '결혼 이야기'를 통해 완전히 갈피를 잃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꼭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맞다. 난 무엇보다 재밌는 게 좋다.) 최근에 이별을 겪은 나는 내가 이별을 했다고 꽤나 떠벌리고 다니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서는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이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단히 '상처뿐인 이별'이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이혼 이야기'도, '사랑 이야기'도 아닌 '결혼 이야기'라는 점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참으로 지루하고 뻔한 제목이로다. 요새 청년들이 누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결혼'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뭐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칼렛 요한슨이 나를 향해 수많은 미디어의 홍수 안에서 가만히 손을 내밀기에, 그 손을 덜컥 잡아버렸다. 그가 그렇게 하면 나는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가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요약해 보여준 뒤,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이혼하는 지를 또 보여주고, 그렇지만 그들이 또 얼마나 인간다운 지를 마지막에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뻔한 얘기다. 이런 류의 러브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힘은 1. 잘 만들어진 캐릭터성, 2. 뛰어난 연기, 3. 독특한 플롯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독특한 플롯을 버리는 대신 나머지 두 개를 모조리 끌고 와 놀라운 힘으로 표출해 버렸다. 일단 연기, 엄청나다. 한 앵글, 한 공간 안에서 두 주인공이 얼마나 폭발할 수 있는지 '쌩'으로 보여준다. 캐릭터성, 말은 어렵지만 얼마나 입체적인, 혹은 얼마나 다채로운 캐릭터냐에 관한 문제인데, 사실 그들이 이토록 다채로우려면 그만큼 현실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그걸 분명히 기억하고 써먹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스칼렛이 극 중 어떤 연기를 하는 배우이며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떤 피해의식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아담 드라이버가 얼마나 뉴욕에 가고 싶어 하는 지도 알 수 있다. (그의 뉴욕 타령, 정말 끔찍했다.) 영화는 두 인물의 감정을 리얼 타임으로, 두 인물의 상황을 보다 현실적인 문제 안에서 보여주면서 그들의 밑바닥을 티스푼으로까지 갉아내는 저력을 보여준다. 본인 얘기라도 이렇게 하긴 힘들다.
'왜 이리 길어?' / '왜 이걸 계속 보여주고 있지?' / '연기 대박인데.' / '언제 끝나.' / '지긋지긋한 사랑, 난 결혼 같은 거 절대 하지 말아야지.' / '점점 지친다. 길어지는 영화도, 둘의 관계도. 빨리 끝내고 도장 찍자.'
이 지긋지긋한 사랑,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영화에선 정말 짤막하게 보여줬지만,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모두 안다. 아니,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게 되고 나를 안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며, 그와 연결되었을 때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의기양양해진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태어난 것처럼, 사랑에는 특별한 목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저 열린 문 앞에 놓인 까마득히 긴 통로처럼, 계속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화의 엔딩이 다가올수록, 더 깊은 의문에 빠져든다. 사랑, 왜 하는 걸까.
내가 제일 애증 관계에 놓인 사람은 단연 엄마인데, 25년을 대화해 왔지만 엄마와는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이제 안 할 거라고 한 애니메이터를 했으면 좋겠다며 격주에 한 번씩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나는 엄마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안다. 나는 진작에 포기를 했다. 그러나 엄마는 포기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말을 따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고 계속 도전한다. 나는 엄마가 그 '가능성'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고 있다. 어쩌면 사랑은, 그 사람을 내가 계속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향한 길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실컷 쏟아붓고 난 두 사람은, 아들을 정확히 반 가르듯 둘로 쪼개기보다 조금씩 양보해 가지기로 하며,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이혼한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 이 사람을 딱 이만큼만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가 끝나면, 이혼 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관계는 또 변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몇 달 전 혼자 쓴 일기에서,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게 사랑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누굴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결국 고작 한 명의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고 바라며, 이해하려고 노력해 온 시간을 사랑이라 여기는 것뿐이다.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방적 희생 없이 한 사람과 맞추며 산다는 건 불가능하며, 우리는 그걸 진작에 포기했어야 한다. 그랬으면 이런 영화도, 이런 고통도, 이런 상처만 주는 말들도 없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확실히 연애하기 편해졌다. 싫으면 헤어지면 된다. 좋으면 좀 매달리다가, 정 안 되면 헤어지면 된다. 그깟 사랑, 거 좀 버리고 다시 주워서 쓰고 또 새 거 사서 쓰면 어떻단 말인가. 꼭 그 음식에만 집착하니까 다른 음식 먹어도 맛없게 느껴지고 막 못 먹으면 죽을 것 같고 그러는 거다. 이러고 나니 온갖 사랑 타령하는 사람들은 죄다 바보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가 좀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사랑 얘기를 쓴다. 사랑 영화를 보고 사랑 영화에 관한 비평을 쓴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약 70년. 정말로 내가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엄마의 간섭과 참견 없이 견뎌낼 수 있을까? 두려움은 다시 나를 영화 속으로 이끈다. 나는 영화 속 클라이맥스를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뱉고 나서 무너져 버리는 아담 드라이버와, 그의 말보다 그의 마음을 먼저 읽은 스칼렛 요한슨의 행동을 지켜봤다. 우리는 분명 그 순간을 겪는다. 치졸하게 싸우고 지겨운 게 인생의 전부인데도, 고작 그 작은 이해의 순간에 감응하고 눈물 흘리고 사랑하기 위해 또다시 견디기 시작한다. 그들도, 사랑을 포기 못한 나도 눈물겨웠다. 꼴사납고, 진풍경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을 한답시고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양 으스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저 모두가 바라고 평생을 애원하는 사소하고 작은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계산 없는 사랑은 없다. 내가 없는 사랑도 없다. 그러니 평생을 바치는 희생도 평생에 걸쳐 아픈 상처도 없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착취일 뿐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영원히 맞지 않을 것 같은 평행선을 걷는 기분과, 그 사람이 없어도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뿐. 우리는 변한다. 우리의 이야기도 챕터를 바꿔가며 계속 변할 것이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에 신경질이 날 것이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모르겠지만... 뭐... 끝까지 바득바득 우기며 사랑을 포기 못하는 것보단 인정하고 사랑을 쥐고 있는 게 모양새는 더 좋다. 사랑 이야기, 정말 좋다. 난 평생 사랑타령하다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