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주 Feb 08. 2020

끝이 없는 어둠 속을 달리는 기분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시력 상실의 공포를 아는 사람만이


 나에게는 꽤 고질적인, 그리고 치명적인 공포증이 있다. 바로 시력 상실에 관한 공포증이다. '공포증'이라고 이름 붙이면 조금 부담스럽고, 그냥 두고두고 생각하는 정도지만, 갑자기 이게 밀려오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한다. 다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이 있겠지만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시력이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가 감독하고 비요크Björk가 출연한 이 영화는, 제목만으로 논하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품이다. 제목으로 내용 유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면, 그런 편견은 버리는 게 좋다. 충분한 준비 끝에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세 줄 요약


 주인공 셀마는 아들 한 명을 키우며 공장에서 일을 한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쁘며 곧 상실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아들의 눈 수술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다. 이들의 사정을 알고 돕는 이웃 부부,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그들과 다투게 되자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정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멘붕은 이 이후에 진행되므로... 스포일러 없이 이 영화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셀마는 죽는다. 그리고 그 전후로 보여지는 모든 과정들이 죄다 충격적이다. 필자는 잔인한 영화라도 예술적이라면 즐기는 편,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즐긴다'고 말하기엔 굉장한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예술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정도까지 해야 하나? 왜 사람을 이렇게 몰아 붙이지?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영화는 잔잔한 템포로 흘러가고, 촬영은 미니멀했다. 뮤지컬 씬에 공을 꽤나 들였지만, 특유의 자글자글한 촬영 느낌이 때로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일반적 뮤지컬 영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음악은 굉장히 신비롭고 또 새롭다. 음악 대부분을 비요크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요크를 처음 접하는 필자로서는 톰 요크Thom Yorke를 연상시키는 사운드가 인상깊게 다가왔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장르 영화로서는, 그저 이렇게도 뮤지컬을 만들 수 있구나 정도. 사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성취보다도 이야기를 더 많이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는 악과 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약간은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다. 약간은 정치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편향 하나로 얘기하기엔 부족하다. 체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장애인으로서의 삶, 범죄자로서의 삶. 그가 겪는 모든 삶 안에서 그의 모든 열망은 음악 하나로 일축된다. 그는 어쩌면 삶의 가치에 대해 체념한 입장이다. 유전적으로 눈이 나쁜 것에 대해서 그는 불만을 품지 않는다. 외국인으로, 장애인으로서 차별받는 것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가 겪는 세상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 그는 바라는 것을 최소화하여 불만을 품지 않게끔 스스로를 설계한 사람처럼 군다. 그런 그가 결국 마리아 역할을 스스로 박탈하고, "다음에 할 기회가 있을거야" 라는 말을 들을 때. 그의 순수한 열망이 무너질 때도 그는 슬픈 표정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상상 속에서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며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절대 포기하지 못했던 한 가지, 아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그 희망이 무너졌을 때 그는 절망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또 다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이토록 순수한데, 그에게 주어진 삶은 그렇지가 않다. 마치 그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 같다. 영화가 관객을 괴롭히기 위해 인물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전개야 뻔하지만, 그가 겪는 고통의 무게 앞에 우리는 또 다시 절망할 수 밖에 없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순수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아무래도 이창동의 <시>였는데, 그가 겪는 삶과 그가 노래하는 삶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여주는지 대조하는 영화라는 점이 그랬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삶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그들을 응원할 수 밖에 없는가. 왜 그들은 그리도 순수한가. 말이 되는 일이 도무지 없는 세상에서 순수라는 게 도대체 무슨 기능을 하는가. 영화 속에서 셀마가 자기는 죽더라도 아들의 눈 수술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랄 때,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동의했다. 눈이 없는데 사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는 때로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삶을 그저 삶 자체로서 보는 게 아니라, 의미를 담은 하나의 움직임으로 보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는 말은 삶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좋은 말이지만, 때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실제로 내가 의미를 느끼는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취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삶 자체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의 주인공 미자가 시를 쓰지 못한다면, 셀마가 춤을 추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들이 의미를 찾지 못해 스스로 버린 삶을, 누가 감히 포기했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이다지도 의미없이 또 흘러간다. 그들이 죽자 영화는 끝나지만, 영화 이후 우리가 겪을 삶에 대해 우리는 깊게 사유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순수하게 열망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의미를 느낄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그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며 그를 위한 것이 세상에 얼마만큼 마련이 되어 있는지. 그걸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존재하는 쓸모없는 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애매한 결론


 '애매한' 이라는 말이 참 좋다. '쓸모없는'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좋아한다. 비록 내가 찍는 영화, 내가 쓰는 이야기 혹은 내가 만드는 세상 만큼은 완벽했으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세상의 불균형을 사랑하고 완벽하지 않은 모든 것들, 쓸모없는 것들로서 존재하고 싶다. 그걸 모두 포용할 정도로 이해가 풍부해지면, 내가 좋아하는 만화 작가가 결말을 개떡같이 내도, 엄마가 말도 안 되는 걸로 날 설득하려 해도, 누구한테 선물을 줬는데 돌려받지 못했어도 괜찮은 사람이 될 것도 같다. 확실히 라스 폰 트리에는 논란이 많은 감독이지만, 그를 꾸준히 살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볼 그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보겠다. 

작가의 이전글 두 번째가 아쉬운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