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수필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지낸 적이 많았다. 연년생인 언니와 내가 두 살도 되기 전에 세상에 나온 동생, 그리고 내리 동생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힘든 딸이 안쓰러워 할머니는 둘째인 나를 업고 외갓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셨다.
외갓집에서 나의 기억은 아마 4~5세 때부터였을까? 그날도 창밖에 하얗게 눈이 오고 있었다. 댓돌 위에도, 장독 위에도, 소복이 눈이 쌓이고 밤은 소리 없이 깊어갔지만 나와 할머니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매에~ 으으응~” “우리 강생이 아직 잠 안자나.”
“옛날이야기~ 으응~”
“옛날 옛적에 호랭이 담배 먹던 시절에….” 그러다 할머니는 가득 쌓인 바느질에 몰두하신다.
“그래서~” 나는 바싹 귀를 세우며 조른다.
'으~응 빨리'
." 가난한 할머니가 손자들을 키우고 살았거든"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금슬이 너무 좋아(?) 자식을 열이나 둔 자식 복이 터지신 분이셨지만, 할아버지는 안동 권 씨 집안의 무능한 백년 서생으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니 열 명의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니 그 고생이야 말로 해서 무엇하겠는가. 옛날에 대부분 그랬듯이 큰 자식들이 동생들을 보살피고 집안일도 거들었지만 그 많은 자식들 키우느라 잠시도 손 빌 시간이 없으셨다. 1920~30년대 일제시절 여인들은 하고 싶어도 돈을 벌 만한 일거리가 없었다.. 다행히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신 할머니는 젊어서는 삯바느질을 하셨다.
참으로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작은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번듯한 직장에 다니시면서 재산이 넉넉하였는데, 그 흔한 자식 하나 없고 돈이 없는 큰집인 우리 할머니 댁엔 돈 대신 자식이 넘쳤다. 작은 할머니는 둘째아들을 양자 들이셨고, 큰집 자식이나 손주를 친자식·친손주같이 거두시면서 아들이 많은 손윗형님인 우리 할머니를 깍듯이 모셨다.
그런 우리 할머니는 굉장한 미인이셨다. 내가 커서도 우리 할머니와 외출을 할 때면 동네 사람들이 “아이구 어쩜 인물이 저리도 좋으실까”,”경국지색이 따로 없어”, “옷매무새도 어쩜 저리도 고울까” 하며 칭찬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맏며느리로 아들딸을 쑥쑥 낳고, 인물 좋고, 바느질 솜씨 좋고, 음식 솜씨 또한 뛰어나 대소사를 척척 처리하시는 우리 할머니는 힘들게 사셔도 자존심이 무척 강하셨다. 그러나 첫 딸의 손녀인 나에게는 평범한 ‘천사표 할머니’ 그대로였다.
낮에는 집안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지만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까맣게 윤이 나는 싱거미싱이 윗자리를 차지한 소박한 할머니의 안방에선 조그만 놋화로에 숯불이 빨갛게 피어나고 그 위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인두가 올려진다. 또한 아름다운 색깔들의 바느질감들이 한방 가득했다. 주름 잡힌 치마 저고리 솜사탕 같은 하얀 솜, 색색의 무지개 빛깔 실들이 잔뜩 감긴 배부른 실패들, 휘어진 자, 몽당연필. 이제 세상은 온통 나와 할머니만의 무지갯빛 동화의 세상으로 변한다.
나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이 시간이야말로 너무나 바쁜 할머니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옛날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이야말로 언니, 동생들 때문에 엄마를 빼앗기고 외갓집으로 쫓겨와 있는 설움도 다 잊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내가 키운 내 강생이.” 할머닌 항상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하긴 외갓집에도 삼촌과 이모의 시기와 질투가 있었지만, 막강한 할머니의 보호막으로 할머니는 내 차지였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보다 바느질하는 할머니 허리를 안고 할머니 냄새를 맡으며 이야기 듣는 걸 무척 좋아했다. 할머니 몸에서는 항상 분 냄새와 동백기름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까만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가운데 가르마를 내어 빗고, 비 단끈으로 묶고 돌돌 말아 비녀를 꽂고 평생을 한복 차림으로 지내셨다. 나는 여태껏 쪽진 머리가 우리 할머니처럼 이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온 세상 여자들이 다 쪽진 머리를 버리고 파마할 때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으셨고, 모두가 귀찮다고 양장을 할 때도 여름엔 옥색이나 노란 치자물을 들인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인형 같은 모습으로 외출하셨다. 겨울엔 누비저고리, 토끼털 조끼에 솜을 많이 넣은 버선을 신고 손목엔 토시를 하고 문밖을 나서시던 고운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다음 주에 계속 -
이 글은 <독서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