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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지선 Aug 24. 2020

옛날 옛적에 (下)

그림이 있는 수필

-옛날 옛적에 후편-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나는 늘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건넌방에선 할머니를 손녀에게 빼앗긴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린다. “으흠, 으흠. 지지바가 일찍 자야지.” “옛날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시집가서 가난하게 산다는데. 험엄.”


 할아버지도 나처럼 할머니방에 오고 싶으신가 보다. “아나, 지지바야. 식혜 먹어라.” 얼음이 서걱거리는 맵고 달콤한 안동식혜 한 사발을 들고 할아버지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또 할머니방을 들락거리신다. 지금에 사 이해하지만 그땐 할아버지 심정을 조금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할매에, 호랑이가 나왔나?” “그래 호랑이란 놈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머억지’ 그랬거든.” “그래서.” 할머니는 잠깐씩 바느질에 빠져 이야기를 끊으신다. 그러면 나는 “그래서 그래서”를 연방 외친다. “엄마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떡을 다 빼앗기고.” “그래서.” “마지막엔 호랑이란 놈이 ‘어흥’ 입을 벌리고 엄마마저 잡아먹고” 하고 할머니가 나를 보고 “ 어흥” 하시면 나는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지르면  이불속으로 숨는다.


국화 꽃잎 넣어 바른 창호지 문엔 앉은 눈높이쯤 네모난 유리를 붙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유리창이 있다. 그 손거울만 한 유리창엔 밤 깊도록 흰 눈이 내리고 바느질하시는 “사각사각” 옷감 부딪히는 소리, 웃묵의 놋화로에 “탓탓탓” 숯불 튀는 소리….


지금도 마음이 가난할 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나는 한없이 행복해진다. 그리운 나의 할머니, 시간을 되돌려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지금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 할머니 이야기 속에 내 인생의 지표가 되어버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할머니가 계셨단다. 그런데 불행히도 못된 며느리를 보았단다. 마음씨 착한 할머니는 불쌍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셨고, 스님이 탁발을 오시면 항상 농사지으신 새 곡식으로 시주하셨다. 그러나 마음씨 나쁜 며느리는 스님이 오시면 물을 뿌려 쫓아냈고 동네에서도 인심이 야박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나이 든 스님 한 분이 대문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고 계셨다. 할머니는 공손히 시주를 하시며 인사를 하니 스님이 ‘할머님, 이 염불을 외우시면 돌아가실 때 극락 왕 생활 겁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할머닌 매일매일 열심히 염불을 외웠거든.”

 “뭐라고 했는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할머니는 날마다 정성스레 염불을 외우셨지만 나이가 들수록 못된 며느리의 구박은 심해지고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는 어제까지 외우던 염불을 까맣게 잊어버리셨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물으셨다. ‘아가 내가 매일매일 뭐라고 염불을 외우디?’ ‘아이고 어머니도 뭐라고 하기는. 뒷집 영감이 남몰래 내 젖통을 만지더라’라고 하셨지. 연로하신 할머니는 며느리의 그 말을 믿고 매일매일 염불을 열심히 외우셨다. ‘어쩌나 뒷집 영감이 내 젖통을 만졌데이.’ 며느리는 동네방네 시어머님이 노망했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그 망측한 염불을 외우며 조용히 돌아가셨다. 그때 부엌의 가마솥에서 연꽃이 가득 피어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나타나서는 할머니를 극락으로 인도하셨다. 구름을 타고 선녀의 호위를 받으며 연꽃 속에 극락왕생하시는 할머니를 본 며느리는 기절을 할 듯이 놀라고 이번엔 그 가마솥에서 도깨비들이 나와 며느리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못된 며느리는 도깨비에게 맞아 죽었거든.” 

나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릴 땐 그냥 이야기로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속엔 엄청난 철학이 들어있었다. 물론 ‘권선징악(勸善懲惡)’도 있지만 ‘염불의 내용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염불 하는 이의 마음과 정성에 참 뜻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떤 곳, 어떤 집에 사느냐’ 등 포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진정한 삶은 남에게 보이는 형식적인 외형보다 어떻게 진실한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며, 남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참으로 진솔한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 교육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사랑만 주셨지만 그 사랑 속에서 인생의 가장 소중한 교훈을 다 보여주셨다. 돈 못 버는 남편을 정성으로 대했으며, 맏며느리의 역할뿐만 아니라 그 많은 십 남매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으며, 낮에는 살림을 살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해서 가정경제를 맡으셨고,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한국 여인의 모습을 흩트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식들과 손녀 가슴에 죽어도 못 잊을 아름다운 모습과 가르침을 남기셨다.


보고 싶고, 그리운 국화향보다 더 그윽한 나의 외 할머니…. 이름도 할머니를 닮았다. ‘배국향(菊香) 여사님.’


이 글은 <독서신문>에 게재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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