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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Nov 13. 2024

6755호실 (20)

기억 10-까르마 

이천팔 년 여름에는 이들의 일곱 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나라 안이나 밖이나 뒤숭숭하다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특별히 이 해의 여름이 나라 경제가 바닥이거나 전쟁의 위협이 더해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이 나라는 계속 휴전 상태였고 지구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테러는 일상이었으니 사람들은 무뎌질 만하건만 나만 무뎌진 것 같았다. 


이번 전시회의 특이점이라면 국이가 참여한 것이었다. 국이는 첫 전시 이후 처음이어서 거의 십여 년 만의 전시였다. 섬에서 올라온 후 꾸준히 작업실에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지만 국이는 그동안의 전시에 빠졌었다. 밍도 굳이 참여하지 않겠다는 국이를 권유하지 않았으나 수는 아쉬워했다. 난 국이의 그림이 좋은데 그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국이와 퇴직한 젠까지 함께 해서 이번 전시의 이름은 ‘팔인 팔색’이었다. 


“난 왜 팔색조가 생각나지? 안 그래요?”

율이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나를 가운데 빈자리에 뉘었다. 이런 호사가 계속해서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났는지 다소 흥분된 초침 소리가 테이블 주변에 흩어졌다.

 

“팔색조와 팔인 팔색이 무슨 관계? 짜증 나려고 함. 율!”

장미향을 은은하게 휘감은 밍이 테이블로 왔다. 몸에 꼭 붙는 검정 원피스는 짧았고 한여름임에도 긴 부츠를 신고 있었다. 


“밍, 여름엔 좀 후레시한 향이 좋지 않아? 장미는 아무래도 봄인 듯.”

율이 지지 않고 밍의 말꼬리를 잡았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작업실의 사람들은 어찌 보면 편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예의 없어 보이는 대화를 하곤 했다. 그들의 대화는 때로 제삼자가 듣기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으나 신기하게도 자기들끼리는 별 문제가 없었다. 누군가 이들의 대화를 시크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 표현이 맞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화원에 가 봐. 일 년 내내 장미 있으니까. 그런데 국이가 안 보이네. 어디 간 거야?”

밍이 주변을 휘 둘러보며 누구에겐가 물었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다 모르겠단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아, 아까 몸이 안 좋다고 좀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내가 깜빡 잊었네. 아주 많이 피곤해 보이더라고.”

국일이 화병의 꽃을 손질하다가 대답했다. 밍의 표정이 굳었다. 


“아프면 들어가야지 뭐. 꼭 다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남은 기간에 한 번은 오겠지. 더욱이 이번엔 여기저기 알린 것도 아니고. 소소하게 자축하죠.”

흰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참이 케이크에 불을 붙일 거냐고 물었다. 

이번 오프닝 행사에는 가족을 부르지 않아서 참의 남편도 국일의 전 시어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국일의 전 시어머니는 여섯 번째 전시회까지는 꾸준히 와서 국일의 그림을 사 가곤 했었는데 이번엔 왜 다 안 부른 것인지 아쉬웠다. 물론 나중에 올 수도 있으니 부디 전 시어머니가 와서 그림을 사 갔으면 하는 바람을 내가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국이가 많이 아파 보여서. 시작합시다.” 

밍은 걱정스러운 말을 아주 사무적으로 해서 사람들의 소리 없는 빈축을 샀다. 


차와 케이크, 과일을 선 채로 먹으며 그들은 각자의 소회를 풀어냈다. 특별히 젠이 시선을 받았는데 어려운 시간을 잘 통과해서 다시 참여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덕담이 이어졌다. 


“이제 다시 리치 젠입니다. 이번 전시 오프닝 비용 다 젠이 낸 것 아시죠? 젠이라기 보단 젠의 남편이라고 해야겠지?”

싱이 건배사를 하자고 제안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아무도 건배하지 않았고 싱만 스파클링 워터가 담긴 잔을 들고 젠의 잔에 부딪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각자 웃었다.

그 사이에 떠들썩한 자리에서 밍이 빠져나간 걸 눈치챈 국일이 귀퉁이에 서 있는 밍에게 다가갔다. 밍은 국이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이십 호의 캔버스에 세로로 그려진 그림 두 점이 국이의 것이었다. 안개가 낀 듯 부연 배경은 분홍과 연보랏빛이 섞여 몽환적이었다. 그 배경을 바라보는 인물은 몸이 비현실적으로 가는 여자의 뒷모습이었는데 크로키하듯 몇 개의 선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여자의 몸도 배경의 색깔이 스며들어서 사람인지 배경인지 나로서는 구별이 거의 안 가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림은 역시 부연 배경인데 푸르스름한 빛을 품고 있을 뿐이고 인물도 없었다. 그림의 밑 부분에 빈 의자가 덩그마니 그려졌는데 역시 단순한 선 몇 개였다. 


“제목이 뭐야? 분위기는 정말 환상적이네.”

어느새 율이 다가와 물었다. 


“제목이... 이게 뭐야. 까르마라고 되어 있는데 둘 다. 영어로 karma”

국일이 그림 밑의 네임카드를 가까이 들여다보곤 글씨를 읽어줬다. 

 

“무슨 뜻인데? 들어본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팸플릿에서 봤을 걸. 그땐 무심했던 모양이지. 나도 국이가 제목 내고는 찾아봤는데 산스크리트어로 인과응보, 업보 뭐 그런 뜻 이래.”

밍의 설명에 조용히 다가온 수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들여다봤다. 


“도대체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국일이 밍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일은 무슨. 국이 그림은 죄다 그랬잖아. 작업실에서 그릴 때 다 봤잖아요. 그때는 샤갈의 하늘에 클림트를 희미하게 얹었다고 환타스틱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 사람이 그리는 그림은 다 비슷하죠 뭐. 안 그래요? 전시회를 몇 번 해도 자기 스타일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율의 이야기는 확실해서 누구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바로 각자의 그림으로 흩어졌고 전시회장에는 첫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전시장을 들러서 온 사람들은 팸플릿을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손에 들고 이들의 팸플릿을 추가했다.

 

“팔인 팔색. 어머 팔색조 생각이 나요. 관계있는 건 아니죠?” 

꽃장식이 달린 모자 밑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회색빛인 초로의 여자가 웃으며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율이 풋 하고 웃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니까.

몇몇 사람들이 더 들어와서 전시장은 제법 붐볐다. 오프닝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음료를 손에 들고 다니거나 쿠키를 먹거나 하기 때문에 바로 빠져나가진 않아 점점 많아졌다. 


“어? 저 사람 목수지?”

손님에게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던 싱이 멀리 선 남자를 알아보곤 율에게 작게 소리쳤다. 

싱이 가리킨 곳에는 긴 머리를 묶은 남자가 반바지 차림으로 그림을 향해 서 있었다. 목수는 혼자인 듯 주변에 다른 사람은 안 보였다. 그의 손에도 몇 개의 팸플릿이 들려 있었고 목에는 카메라로 보이는 물체를 매달고 있었다. 그도 오늘 오픈하는 전시장을 몇 군데 들러 온 것 같았다. 


“사진 촬영 됩니까?”

목수가 대상 없이 물었다.

 

“네, 포토 가능하다고 써 놨는데요.”

밍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긴 밍은 그녀의 손님으로 바빴고 그들의 전시회는 언제나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목수는 분명히 알고도 물은 것 같았다.  

목수가 사진을 찍는 동안 율은 그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나는 목수가 좀 불쌍해 보였지만 율은 목수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걸 모르는 목수가 답답했다. 


“혹시 국이가 있던 섬에 같이 근무한 적 있어요? 뭔가 그런 느낌이 자꾸 오는데 못 물어봤거든.”

율이 곁으로 다가온 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순간 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수의 웃음소리는 크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진 못했다.


“아니, 율. 난 섬에 간 적은 없어. 그런 상상을 하다니. 왜 그렇게 생각했어?”

수도 율의 귀에다 속삭이듯 말해서 다른 사람이 볼 땐 이상하게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냥 국이가 섬에서 병을 얻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요. 누구도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섬 생활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고도 했고. 또 국이가 수를 볼 때의 느낌도 좀 석연치 않았거든요. 뭐, 아니면 아니지만.”

율의 설명에 수는 율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다른 건 몰라도 국이가 아픈 것은 그냥 직감이었어. 내가 아는 병 같아서.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수의 느닷없는 얘기에 율은 잠깐 멈칫했다. 


“왜, 뭔데요?”


“그냥 모른 척 해.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데 알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

수는 씨익 웃으며 밍쪽으로 갔다. 

밍은 사람들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전시회장을 훑고 있는 것 같았다. 밍의 손에 붉은 장미 한 다발에 들려 있었다. 밍은 장미 다발을 수의 그림 밑에 놓았다. 수가 의아한 걸음으로 다가갔지만 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은 좀 인사라도 하지, 거 참. 벌써 목수는 간 모양이네.”

싱이 두리번거리며 목수를 찾았다.


“그림 사진 찍고 갔어. 그 사람은 늘 율 그림 찍잖아. 성향이 독특하긴 하네. 율과 잘 맞으려나?”

밍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수를 바라봤다. 


“꽃은 목수 동생이 보낸 거래요.” 


“동생?”

수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밍과 꽃다발을 번갈아 보았다. 

수의 황량한 사막 그림 밑에 놓인 장미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모세의 불붙은 떨기나무 같은데요?”

싱이 웃으며 수에게 말하자 수가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렇게 보는 방법이 있군.”

수의 대답에 밍과 율이 무슨 소리냐며 물었지만 둘은 그저 웃었다. 


“교회 사람끼리 아는 말인가 봐.”

율은 흥미 없다는 듯 자신의 그림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어린아이를 그린 자신의 그림 밑에 망초꽃묶음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율은 입을 꼭 다문 채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전시장을 정리하려고 싱이 앞치마를 입었고 밍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청소하라는 싱의 재촉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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