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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Mar 11. 2023

어쨌든 GG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나의 30년 모임의 이름은 ‘그림을 그리고 또 하염없이 그린다’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시작이 그림이라는 것이고 물론 지금도 그림을 그리긴 한다. 


그런데 '그리고 또 그리고 끝없이 그리는'이라는 긴 이름에 느낌도 상당히 레트로라기 보단 키치적이어서 그 이름을 계속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멤버가 여럿이다 보니 이름 가지고 토론하긴 서로 귀찮았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작업실 유리창에는 그 길고 유치한 이름이 시트지로 붙어 있다. 

      

며칠 전 드디어 길고 긴 공직에서 은퇴를 한 친구 두 명을 축하하기 위해 우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장소와 선물을 센스 있는 후배에게 준비하도록 부탁하고 나는 초대의 글을 맡았다. 그래봐야 SNS에 올리는 건조한 것이긴 하나.     


A와 B의 은퇴를 축하하는 의미로 조촐한 파티를 갖고자 하니 지진이나 전쟁이 없는 한 다 참석하시오.  

1. 시간 : 돌아오는 토요일     

2. 드레스코드 : 풀메에 세미정장 이상(작업복 출입금지)      

3. 장소 : C가 정할 것임   

4. 참가비 :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이 초대장에 대해 다른 이견은 없었으나 드레스코드에 대해 말이 많았다. 

살이 쪄서 맞는 정장이 없다느니, 아웃도어 외엔 옷이라곤 없다느니, 배트맨 복장을 하고 온다느니......


사실 당장 나부터도 풀 메이크업을 할 화장품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획도 못 세울 일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작업복에 군화 같은 그림쟁이들의 모습으로 올지언정.     

생각대로 우리 모임은 제시간에 모였고 서로의 준비에 대해 칭찬하고 즐거워했다. 

     

“넌 아직도 원피스에 허리를 졸라매고 다니니?”

나의 검은색 원피스를 보고 D가 놀렸다. 

    

“역시 부자는 다르다. 넌 기럭지가 길어서 그렇잖아도 패셔너블한 데, 와 저 셀룰리안 블루스카프 봐라. “

우리 중 가장 늘씬하고 예쁜 E를 보고 누군가 또 떠들었다. 

     

모두들 한 마디씩 하면서 시끌벅적한 식사를 끝내고 난 뒤 독립된 온실형 카페를 독차지했다. 

    

“사용 시간은 3시간입니다.”

앳되고 상냥한 직원이 한 마디 하자 우리도 모두 한 마디씩 비슷한 여섯 마디를 했다. 

     

“우리가 뭐 3시간이나 있진 않겠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4시간을 넘게 있었다. 그 나이의 젊은 할머니들이 그렇듯. 

     

“우리 이름이 그리고 또 그리고 무한 그리고 뭐 그런 거잖아. 간단히 ‘그그’라고 하면 어때? 그렇고 그런 모임”

나의 제안에 은퇴하는 A가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름대로 되더라구요. ‘그렇고 그런’이라고 이름 지으면 진짜 그렇고 그런 모임이 돼. 그건 안 되잖아.”


“지금 뭐 그렇고 그렇지 않아? 그림도 그리긴 하지만 말야.”


“언니가 'Drawing & Painting' 스튜디오라고 써 붙였잖아. 그게 좋지 않나?”


“그럼 D.P네. 얼마 전에 넷O에서 영화 한 것도 D.P지? 군무이탈 체포조던가? 그거 괜찮다."


“아유, 뭐가 괜찮아. 무슨 체포조야. 그냥 GG라고 해요. 그럼 ‘그렇고 그렇던지’, ‘그리고 또 무한 그리던지’, ‘그냥 구리던지’ 다 상관없잖아.”


우린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길 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독립된 온실 카페가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린 아마 바깥으로 내쫓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다른 손님들을 내쫓았거나. 

     

“뭐든지 하여간 이 GG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던 건 저예요. 저는 GG에 오는 재미로 일주일을 버틴답니다.”

우리 중 유일한 현직이며 패셔니스트인 E가 진심을 토로했다. 

정말 그녀는 작업실엘 빠지지 않고 제일 일찍 오는 모범 멤버였다. 

     

“그래. 퇴직하고 나면 정말 갈 곳이 있어야 하는데 우린 잘 견뎌온 것 같아. 파투 내지 않고 말야.”   

  

“남편 하고 하루 종일 있는다고 생각해 봐. 우리 남편은 일주일에 사흘은 나가는데도 남은 나흘을 염증 나서 못 견뎌하더라고. 남편만 그런가? 나도 마찬가지지.”   

  

“우리 남편처럼 일주일 내내 집에 있길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하긴 집에 있어도 각자 방에 있으니까 얼굴 볼 일이라곤 밥 먹을 때뿐이지만.”  

   

“내가 작년에 전원주택에 가서 텃밭이라도 가꾸자고 집을 보러 갔다. 그때가 약간 어스름했는데 이 남자가 차에서 안 나오는 거야. 집을 볼 생각도 없는 거지. 그래서 왜 그러냐니까 시골은 깜깜해서 무섭대. 이게 말이니 말씀이니? 아휴 그래서 전원주택은 포기했어. 오피스텔 하나 얻어주고 나 혼자 가던지 해야지.”  

   

“말처럼 쉬우면. 그게 어디 돼? 나이 들면 안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재에서도 모르는 법이라 좁은 집이 맞는 거래요. 그런데 따로 산다는 건 아니지.”   

  

“우리 작업실 건물주는 졸혼할 거라고 하던데? 지난주에 커피 마시러 내려와서 그러더라고?”     


“오 마이 갓. 그렇게 훌륭한 생각을? 그런데 와이프도 찬성했을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졸혼하고 떠나면 우리 작업실도 빼야 할 것 같은데. 지금처럼 싼 월세로 계속 주겠어요? 와이프는 보통 아니겠던데.”   

  

“아, 그런 문제가 있구나.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 되는 그런 일이네. 그럼 어쩌나, 졸혼을 막고 싶진 않고 우리가 또 어디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넌 그림도 안 그리면서 장소 걱정을 하고 있니? 우리가 이렇게 계속 작업실을 유지해야 하는 게 맞는 거야?”

결국 D가 결정적인 얘기를 했다.


우린 계속 이 작업실을 유지하면서 지내야 하는가에 대해 가끔씩 회의적이었다. 비어있는 시간이 많고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패셔니스트 E와 나를 제외하면 거의 이 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이용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효용 면에 있어서는 생각할 여지가 많지. 그런데 다 은퇴한 마당에 이런 장소 하나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생각은 그래.”


어떤 모임도 없는 무공동체인 나는 GG가 유일한 모임이었다. 그렇다고 내 입장만 얘길 할 상황은 아니었다.   


 “안 돼요. GG는 어떤 일이나 모임의 장소 혹은 작업의 장소 이상의 의미잖아요. 여기서 쫓겨나면 더 변두리로 가더라도 구해봐야죠.”   

  

“야, 여기가 변두리야. 더 변두리는 없어. 지하로 가면 모를까.”


“엘베 없는 4층이나 5층도 괜찮지 않아? 한 번 올라가면 저녁에 내려오니까.”  

   

우리는 계속 작업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누구도 작업실이 없어진다는 상상을 하기는 힘들어했다. 

없던 작업실도 은퇴하면 만든다는데 현직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이어왔던 작업실을 없앤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늙어간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맞아. 우린 정말 노년 계획을 잘 세운 거 같아. 이 나이에 할머니들이 이런 장소를 갖고 있는 게 흔한 일이야? 끝까지 잘 가 봐야지. “   

  

“나 죽을 때까지는 계속돼야지. 내가 제일 먼저 죽는 게 순서잖아?”


“언니는 결론이 죽는 거더라. 그렇게 죽고 싶어요?”


“피할 수 없으니까 친해지는 거야. GG 파이팅!”  

   

살면서 잘한 일 중의 하나는 60 넘어 70을 향해 가면서 아직도 GG라는 모임이 지속되고 그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디 나의 세대와 그다음 세대 할머니들도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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