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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Mar 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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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죽음

휴일 아침 걸려온 늙은 친구의 전화는 대개 나쁜 뉴스인 경우다.

늙어서 아무리 아침잠이 없어도 식전 댓바람에 친구에게 자랑 전화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드디어 손자를 봤다거나, 로또에 5000원이 당첨되었다거나, 나이 찬 자식이 결혼하게 되었다거나 같은 이야기를 아침에 전화로 하진 않는다.      

그러니 이른 아침 전화는 누가 죽었다거나 혹은 배우자가 졸혼을 선언했다거나 같은 심각하고 우울한 뉴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그랬다. 

전화를 받는 남편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평소에는 아침에 세수를 하지 않는 나였지만 혹시 함께 외출해야 하는 경우인가 싶어 부지런히 얼굴을 씻었다.  

    

‘무슨 일이야?’

로션을 문질러 바르면서 남편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D가 어제 떠났다네. 하늘로.”

심상찮던 남편의 표정은 금방 우울에서 해방되긴 했다. 그렇다고 행복해 보인 것은 아니다.   

  

D는 나도 잘 알고 있는 남편의 고교동창이었다. 그는 목사였고 상담가였으며 암 치료센터를 운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암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나서 살아난 경험자였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연으로 치료하는 방법의 전파자였다. 

    

지난여름, 내가 D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당뇨로 인해 겨울 개나리같이 마른 몸이었고 걷는 것도 힘들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팡이를 의지해 우리와 함께 산길을 걸었으며 음식을 먹고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D가 약도 치료도 없이 자신의 모든 병을 그냥 짊어지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으나 그는 당연한 듯이 보였다. 당뇨가 심해지면서 곧 떠날 것을 예감하고 준비했지만 생각보단 좀 더 머물렀던 D는 나의 남편과 동갑이었다.  

    

“결국 가셨구나. 참 깔끔한 분이 깔끔하게 사시다 가시는 것도 깔끔하게 가셨네.”

고인이 자신과 동갑인 친구의 경우는 내상이 좀 더 크기에 난 더 이상 사족을 달지 않고 조문했다. 

그러면서 내가 함께 가야 할 일은 없겠구나 싶어 로션만으로 오늘의 얼굴을 마무리했다. 왜냐하면 시간상 편도 2시간 이상의 거리는 애경사를 떠나 부조금으로 대신한다는 아주 이기적인 나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내가 당사자일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니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처음엔 어이없어하더니 나에게만 해당된다는 말에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그래도 물어는 봐야지 싶었다.  

   

“어느 병원이야?” 

조문장소를 묻는 내게 남편은 머뭇거렸다. 

    

“그게...... 홍천이야. 집에서 임종하고 옆 교회에 모셨나 봐.” 


홍천은 D가 있던 곳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곳에 있다.

오대산 한쪽 기슭에 자리 잡은 D의 치료센터는 거의 불치병을 가진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별다른 치료를 하지는 않고 자연 속에서 함께 밥 해 먹고 차 마시고 산책하며 살다가 병이 낫기도 했고, 더 많이 죽기도 했다. 

숲이 깊은 만큼 맑고 곱기도 한 곳인 데다 아픈 사람들이 있으니 누가 죽어도 그다지 소란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죽은 D가 그곳에 조금 더 머문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이 산 자와 함께 2박 3일을 머문다는 것은 살아있는 나의 입장에선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교회에 냉동고가 있을 리도 없고 시신을 그냥 관에 담아 놨다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때도 완연한 봄날이었는데 집에서 병풍 뒤에 모셨던 기억이 스쳤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서 괜찮은가 싶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 사람아. 냉동고가 뭐야. 시체안치실이지. 글쎄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남편은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를 받기에 바빴지만 정작 문상을 가려는 채비는 없었다.  

   

사실 남편을 비롯하여 누구도 부고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치료센터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남편의 의사 친구에게만 고인의 부인이 전화로 연락을 한 게 다였다. 그 친구가 오늘 아침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알렸던 것이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유언이라도 했나 싶었다. 

D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D는 자신의 두 아이들이 결혼을 할 때조차 아무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D지만 그는 친구들의 애경사에 매우 열심히 참석했다. 심지어 금요일 밤중에 했던 내 딸의 결혼식에도 먼 길을 D부부가 같이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나는 남편이 문상을 가지 않길 바랐다. 

일단은 당사자인 D는 죽었고 부고를 알리지도 않았고 조의금도 사절한다는 의사 친구의 전언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의 운전이 불안했다.

남편은 식곤증이 있어서 식사 후에는 반드시 졸았다. 본인이 인정을 하건 않건 사실이 그랬다. 그래서 장거리를 갈 때는 내가 운전을 했는데 홍천까지의 거리는 왕복 5시간이 꼬박 걸렸고 더욱이 휴일이었다.  

    

“D 목사님은 좀 부럽다. 좋은 나이에 좋은 모습으로 가셨으니 말이야. 

남편과 동갑인 나이 얘길 하면서 좀 뜨끔했으나 병과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D의 삶과 죽음을 난 진정으로 존경했다. 

    

“갔다 와야겠어.”

내 얘기에 아무 대답도 없던 남편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연락이 닿은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당신이 운전하게? 왕복을 다?”

방금 점심을 먹고 난 이후였고 다시 말하지만 남편은 식곤증이 있었다.   

   

“가야지. 내가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사모도 만나서 얼굴도 보고.”

가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아니 말리는 것은 나쁜 일이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더니 남편이 과연 오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혼자도 아니고 보험관계도 복잡할 동승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내가 죽거나 남편이 죽어도 나 같은 사람이 몇은 있겠구나 싶어 유언장은 아주 확실하게 써놓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속의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말 것’     

D도 분명히 그렇게 유언한 것인데 왜 유족들은 그 유언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일까.

당사자는 이미 죽었고, 애도는 각자의 몫인데.   

  

다행인지 아닌지 남편은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왔고 아직 관 뚜껑을 닫지 않아서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텐데 남편은 가서 보길 잘했다고 했다. 

그렇지, D는 남편의 친구였고 어쩌면 자신을 보는 느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먹으면서 이제는 주로 죽음의 소식일 텐데 나의 이기적인 원칙을 수정해야 하나 하다가 그보다는 예외 조항을 두기로 했다.   

  

예외 : 친구 또는 그와 버금가는 관계에는 거리와 시간에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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