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의 죽음
남편의 친구인 A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간 남편의 친구가 몇 죽기는 했지만 친구의 아내가 죽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소식이 충격이었던 것은 A보다는 젊은 그의 아내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숱하게 말하고 들어왔어도 정작 순서가 바뀌면 말처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 그런 죽음이었다.
“그래도 1년은 생존할 거라고 했는데 열흘 만에 가셨네.”
수술한 병원이 S대학 병원이라며 쾌유를 기대했던 남편은 아쉬움을 그렇게 중얼거렸다.
S대학 병원이라고 남은 수명을 예언하는 능력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남편은 무턱대고 S대학 출신 의사들을 신봉했다.
동네에 있는 치과도 비뇨기과도 안과도 다 S대학 병원 출신 의사들을 선호했다.
자신의 모교도 아니고 마누라나 애들이 다닌 학교도 아닌데 그는 왜 그렇게 S대를 좋아하는 걸까.
가족 중 아무도 가지 못한 대학에 대한 보상 심리일까?
하여간 그렇다고 애도 중인 남편에게 S대학만 대학이냐고, 그 잘난 병원에서 잔여수명을 택도 없이 가늠하지 못하느냐고 가타부타 따질 일은 아니었다.
“시작됐네.”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남편은 작은 눈을 열심히 크게 뜨며 쳐다봤다. 정말 남편의 눈은 보기 드물게 작았지만 40년을 살아오면서 점점 더 작아졌다.
“뭐가 시작돼? A와이프가 죽었다는데.”
남편은 확실치는 않으나 뭔가 죽음과 관련해서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이제 배우자의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거지. 아직까지는 대개 부모님이었잖아.”
그랬다. 물론 우리 시어머님처럼 오래 살아계시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돌아가셨다.
다행히도 A의 부모님과 장인장모는 다 돌아가신 상태였다.
“어머님도 올봄에는 가시면 좋겠어. 시할머니도 개나리 노랗던 봄날 가셨는데.”
“그랬어? 할머니가 봄에 돌아가셨나?”
결혼하면서 시부모님의 생신은 물론 온갖 행사를 챙기는 것은 다 내 몫이었으니 하물며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 리가 없는 남편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나에게 적어도 ‘어떻게 그렇게 얘길 해?’라고 한 마디 할 만했으나 남편은 할머니 얘기만 했다.
남편에게도 어머니는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것일까?
‘나도 자식들한테 짐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할 텐데. 참 커다란 과제가 남았구나.’
내가 90이 넘고 100살이 넘어서도 살아있다면 우리 애들의 마음 또한 남편 마음 같지 않겠는가.
94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버지는 7년간 혼자 요양원 생활을 하셨다. 그렇게 고독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내야 했던 아버지를 방문할 때마다 난 똑같이 묻곤 했다.
“아유, 우리 아버지 아직도 안 돌아가셨네. 어쩌나, 빨리 가셔야 할 텐데.”
나의 이 말은 진정이었음에도 아버지는 농담인 듯 무심하게 웃곤 하셨다.
“그러게 말이다. 저기 저 산에 엄마가 있는 것 같아서 얼른 가고 싶은데 말이다.”
요양원 창문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송전탑이 늘어서 있는데 아버지는 그곳을 엄마의 천국으로 정하셨다.
“아버진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엄만 별로인 것 같은데?”
라고 얘길 하면 다시 웃곤 하셨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레트리버였다.
그렇게 레트리버를 닮은 아버지는 끊임없이 엄마를 그리워해서 때론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런데 친구들 부모님의 경우는 좀 달랐다. 배우자가 죽고 긴 세월을 그리움에 힘들어하던 우리 아버지와는 다르게 덤덤하셨기 때문이다. 친구들 부모님뿐만 아니라 나의 시어머니도 돌아가신 시아버지 얘길 한 번도 안 하셨다. 남편이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의 묘지를 손질하고 사진을 찍어 자랑스럽게 보여드리면 늘 같은 말씀이었다.
“거긴 뭐 하러 자꾸 가? 힘들게.”
어머니는 자식이 힘든 것만 한 마디 할 뿐 아버님에 대한 어떤 정이나 호감도 없었다.
“어머닌 아버지 안 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고 하시던데?”
남편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사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더 건강해지셨고 활기가 넘쳤다. 도대체 아버님이 어머님께 얼마나 섭섭하게 하셨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후배인 U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U의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90을 훨씬 넘기셨지만 전혀 그리움 없이 주변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잘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엄청 싸우셨어요. 아마 그래서 지겨울 수도 있지.”
U는 자신도 아버질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땐 더없는 효녀였다.
그러니 그녀의 부모님 싸움 이야기도 100% 믿을 수는 없었다.
평생을 싸웠다 해도 미운 정이란 게 있을 텐데 U의 아버지 역시 죽은 엄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리움은커녕 생각도 않는 것 같다고.
C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은 아직 친정 엄마가 살아계신데 그분들도 U의 아버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누구는 젊었을 때, 누구는 늙었을 때 배우자와 사별을 했지만 죽은 사람과의 추억이나 그리움이 상실과 아픔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우리 아버진 왜 그랬을까? 내가 보기에 그다지 살뜰하지도 않고 무덤덤한 부부 사이였을 뿐인데.
“수술을 안 했더라면 좀 더 살지 않았을까 후회하더라고. 그런데 그런 결정을 어떻게 하겠어? 와이프가 수술을 거부한 것도 아닌데.”
남편은 다시 A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강암이 본래 먹지를 못하니 산다고 해도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내 생각엔 차라리 잘된 것 같아. 오래 고생하지 않고 가셨으니. 환자나 보호자나.”
A는 남편 또래이고, 그 아내는 내 또래이니 남의 일 같지 않아 다시 한번 당부를 해 두어야겠다 싶었다.
“만일 내가 오징어땅콩을 안 먹겠다고 하면 무엇이든 억지로 먹이지 말아요. 그걸 거부할 정도면 죽을 때가 된 거니까. 병원에 보내지 말고 그냥 놔둬요. 옆에서 손이나 잡고 있으면 돼.”
워낙에 초딩 입맛이라 온갖 불량식품과 포화지방, 트랜스지방, 당류를 가리지 않고 먹는 내가 과자를 거부한다면 그건 정말 때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살려보겠다고 부질없이 노력하지도 말고 코나 목이나 옆구리에 줄을 끼워서 먹이려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어보라.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누가 먼저 죽을지 어떻게 알아?”
남편은 내 말에 즉답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누가 먼저 죽든 그렇게 하자고. 당신이 먼저 죽게 돼도 굶게 놔둘 거야. 손은 잡아줄게.”
남편은 나를 굶기겠다고 끝까지 답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예고는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비록 내가 S대학은 아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친구 A가 하루빨리 아내 생각이 하나도 안 나길 간절히 바랐다.
우리 아버지처럼 힘들어하지 말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처럼 그렇게 담담해지길.
장차 우리 남편이나 나 또한 그러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