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자기소개서에 쓰지 못하는 몇 가지 말들이 있다. 대단한 뜻보다는 그냥 돈 벌려고 지원했다거나, 내 미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회사의 미래를 예상하겠냐는 따위의 것들. 비슷한 과정을 몇 번 거치다보니 이젠 빈말 1000자 쯤 거뜬히 적어낼 수 있는 취준생이 되었다.
나는 어딜 가나 당당하게 취향을 밝히는 사람이지만 희한하게 자소서를 쓸 때만큼은 그렇질 못하다. 윗분들에게 한심하게 보여질 것만 같은 두려움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래서 적당히 핵심은 숨긴 채 그럴 듯한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나가곤 했는데, 거짓말이 아닌데도 무언가 속이는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그래서 오늘은 솔직하게 얘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꿈을 꾸고, 꿈을 키울 수 있었던 진짜 이유들. 비록 평생 자기소개서에 담진 못하겠지만 여기에라도 털어놔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나의 꿈은 라디오PD다. 대외적인 지원동기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틀어놓으셨던 라디오' 때문이지만 실은 더 복잡하다. 엄마가 라디오를 자주 들으셨던 것도, 그래서 라디오가 익숙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냥 막연히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었다. 이유는 당연히 아이돌 보고 싶어서.
내가 방송국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처음엔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정했다. 마침 성당과 중학교에서 아나운서를 맡고 있었고, 아침마다 즐겨 듣던 라디오의 DJ 황정민 아나운서가 너무 즐거워보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거쳐 '소통'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냈지만 대학교 입학 후 아나운서는 나와 맞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오랜만에 맞닥뜨린 진로 고민에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던 중 많은 위로를 받았던 라디오를 떠올렸다. 사람 사는 얘기도, 아이돌도 좋아했기 때문에 라디오PD로 일한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지금의 꿈을 택했다.
돈 벌고 싶었으면 진작 다른 일 했을 거다. 슬프게도 나는 돈보다 흥미가 중요한 사람이라 방송국을 놓지 못했다. 어차피 돈 벌어야 하는 거 아이돌이랑 일하고 싶었다. 그것도 이왕이면 아이돌 많이 나오는 음악 채널로. 그 와중에 라디오에까지 진심이 되어버려서 다른 피디직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현타도 자주 왔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눈만 높아져서... 때론 왜 하필 주전공을 미디어로 삼았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미디어를 복수전공하고 본전공은 따로 있는 사람들에 비해 특장점이 없거나, 너무 시야가 좁은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도 이 길을 택해서 다행인 일들도 많았다. 학과 특성상 방송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졌다. 하루는 모 방송국의 제작발표회 스탭으로 일하게 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인지 모르고 그냥 재밌어 보이기에 지원했는데 알고보니 무려 소녀시대의 유리가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2007년 다시 만난 세계 때부터 10년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나의 오랜 최애이자 첫 우상. "팬이에요"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나는 언니의 비즈니스를 방해하지 않는 성숙한 팬이니까. 프로답게(?) 하던 일을 마저 했다.
행사 중 언니에게 질문이 들어왔다. 보통 유일한 여성 패널은 전문적인 모습보다 '꽃'으로만 비춰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내용이었다. 언니는 "피디님이 제게 바라는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20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옆에 앉은 PD님도 "이미 유리 본인이 '예쁘게 앉아만 있어야 하냐'고 우려했던 부분"이라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와,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니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웃기게도 방송일을 꿈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우상이 생각보다도 훨씬 단단하고 멋진 사람이어서, 내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렇게 멋진 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힘들더라도 조금 더 도전해볼 가치가 있겠구나 싶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팬이라면 공감할 거다.
이후로도 몇 번의 행운이 있었지만 각설하고. 고작 '아이돌이 보고 싶어서'라는 마음에 시작한 꿈은 이렇듯 타당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그들이 보고 싶어서 노력해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느낌만으로도 나에겐 큰 힘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이 더 좋아질 수 있는 건데 이보다 더 바람직한 진로 설정이 어디 있을까. 때때로 의구심이 들더라도 '그냥 난 어쩔 수 없이 방송일을 해야 할 사람인가보다' 체념하기로 했다.
작은 목표가 있다면 언젠가는 꼭 최애와 같은 프로그램을 꾸리는 것이다. 김피디와 센디. 팬싸인회에서 조심스레 내 포부를 밝힌 적 있는데, 나에게 꼭 만나자며 '00피디님'이라 불러주었던 그 음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또 한 번 이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그는 나를 '00피디님'이라 불러주었고,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가 아니라 부적이 되었다. 다 때려치고 싶을 때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힘이랄까. 요즘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서 '이러려고 이 바닥에 끈질기게 붙어있지' 생각한다.
나중에 정말 꿈을 이루고 나서 그 때 그 사람이 나였다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힘내서 약속 지켰다고. 기억할진 모르겠지만 대충 아는 척 해주겠지 뭐. 그거면 됐다. 아니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장르가 아이돌이니까 아이돌 노래를 가득 선곡해서 덕잘알 피디로 소문 나는 것도 좋겠다. 숨겨진 명곡도 계속 발굴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방송을 만들 거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고정 게스트 자리에 나의 수많은 차애들을 앉히는 것도 재밌겠다. 본격 피디 사심 채우기 방송. 하여튼 하고 싶은 건 산더미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업무 만족도 300%에 이르는 그 날까지. 미래의 김피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