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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란 Dec 30. 2021

김씨의 덕질일기 5 : 전지적 덕후 시점

♪ 온앤오프 - Beautiful Beautiful


덕후는 덕후를 알아보는 법.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그 사람이 누굴 좋아하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상대의 물건에 붙어있는 일코용 스티커를 알아본다든가, 스치듯 흘린 멘트에서 덕질 상대를 알아챈다든가 하면 대개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밝히곤 한다. 이를 계기로 미묘한 친밀감과 신뢰를 쌓아가며 친해진 친구도 여럿 된다.


대학 동기 A는 단대의 날에서 처음 만났다. 어쩌다보니 옆자리에 앉아 스몰토크를 나누다가 너무 피곤해 보이길래 이유를 물었다. 머뭇거리다 하는 말이 아육대를 다녀왔단다. 필이 딱 왔다. 동족이구나. 자연스럽게 나도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밝히며 서로의 가수를 공유했고, 그 이후로 우린 절친이 되었다.


하루는 학교에 A의 최애 그룹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나 모르고 있진 않을까 싶어 재빨리 A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되자마자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빨리 끊으라는 다급한 말과 함께 전화가 툭 끊겼다. 얼떨떨한 채로 오르막을 올라가니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A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학교 커뮤니티에 소식이 올라오자마자 응원봉을 챙겨 달려나갔다고 했다. 역시 멋진 내 친구. A는 그 이후에도 충실히 오프를 다니며 꾸준한 후기를 들려주었다. 비록 지금은 새로운 사랑을 키워가고 있지만 그때 그 친구의 열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대단하다. 덕분에 덕질 쪽으로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B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원랜 친구의 친구 정도였는데, 고2때 같은 반이 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쌍둥이라 불릴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희한하게 아이돌 취향이 정말 잘 맞아서 같은 그룹을 좋아한 적도 많다. 고3땐 쉬는 시간마다 붙어 앉아 동방신기와 소녀시대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폰 한 쪽을 나눠낀 채 빅스의 다준돼를 함께 따라췄을 정도다.


그랬던 과거와 달리 현재 B가 좋아하는 그룹은 내 취향과 맞지 않다. 심지어 몇 년 전만해도 B와 함께 "얘네가 인기가 많다고? 정말? 대국민 몰카 아니야?"라며 의심했던 그룹이었다. 어쩐지 B가 부쩍 그 그룹 이야기를 자주한다 싶었더니 결국 재작년쯤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과거가 무색하게 지금의 B는 재산의 대부분을 앨범과 굿즈와 행사와 온갖 것들에 투자하다 잠시 다른 태국 가수에게 눈길을 돌리고 있다.


취향이 다른 덕질은 처음이라 처음엔 대화하기 낯설었다. 이미 B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떤 부분에서 귀여운 건지 몰라 당황스러운 마음과, 그래도 친구니까 반응해주고싶은 마음이 자주 충돌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중점을 잘 맞춰가는 중이다. 나도 B에게 물들어 가는 건지 그 그룹의 좋은 점도 많이 보인다. 이래서 익숙한 게 무섭다는 말이 나오나보다.


C는 내 동생이다. 우리 귀여운 C는 평생 아이돌에게 관심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그룹에게 입덕한 것 같다며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눈치채고 있었다. 나야 뭐 원체 여러 아이돌의 영상을 자주 본다지만, 언젠가부터 C가 한 그룹의 영상과 노래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튼 C는 다소 조심스럽던 고백 이후 본격적으로 첫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해온 게 있어 '나와 비슷한 수준이겠거니'했는데 아니었다. 당시 C는 고등학생이었음에도 통장을 털어 지난 굿즈와 앨범을 사모으더니 찐팬만 산다던 최애 인형까지 구매했다. 부모님도 신기해할 지경이었다. 언니만 믿으라던 내 말을 정말 잘 믿어버린 바람에 팬들끼리 공구하는 응원봉, 일명 0배트를 대리수령해달라는 부탁도 받은 적 있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비를 뚫고 강남까지 다녀온 날,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을 보곤 내려던 짜증의 60%만 냈다. 이 맛에 동생 키우지.


안타깝게도 최애의 논란 이후 C는 탈덕과 동시에 모든 물품을 처분했다. 하지만 응원봉과 응원법만큼은 오래 남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자매와 함께 하고 있다. 지금은 또 다른 그룹을 만나 예전 못지 않게 열렬한 사랑을 퍼붓고 있다. 힌트를 주자면 최근 동생의 오빠들이 동반입대를 하셨다. 우리집 막내가 걱정하고 있으니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그 밖에 같은 그룹을 좋아하길래 이어준 나의 친척 언니 D와 내 동기 E, 최애를 매개로 블로그 이웃이 된 후 소소한 댓글을 주고 받고 있는 F님과 G님, 별안간 예상도 못했던 그룹과 멤버에게 빠져 그들로 매일을 버티고 있는 H 언니와 I 언니 등등.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더니 내 주위엔 덕후가 많다. 누굴 좋아하든 얼마나 좋아했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명목 아래 오가는 이야기는 참 다양하다. 서로의 티켓팅을 돕는 것은 당연하고, 길 가다 서로의 연예인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한다.


그들을 보다 보면 남들이 보는 내 덕질은 어떨지 새삼 궁금해진다. '어쩜 저렇게 열심일까?' 생각하다가도 '누군가는 날 그렇게 생각하겠지' 싶어 머쓱해질 때도 있다. 덕질마다 각자의 영역과 특징이 있어서 내가 모르는 덕질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내 일이 아니라 마냥 재밌어 보이는 탓도 있다.


오늘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본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 앞에 놓인 덕질에 집중하느라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한발짝 떨어져 남을 통해 나를 느낌이랄까. 주변인들의 덕질을 보다 보면 '나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내 블로그에 덕질 관련한 포스팅을 쓸 때마다 즐거워보인다는 댓글을 자주 보는데, 여러분들도 그렇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나 좋자고 하는 덕질이니까요. 이 글을 보실 분들도 저처럼 행복하게 덕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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