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에서 나눠 받은 아름다움
아직 날이 쌀쌀하지만 봄의 기운이 움트던 4월 초, 나는 홀로 요크 York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요크에 먼저 다녀온 친구들이 서점을 여러 군데 돌아다녔다는 말을 듣고 단숨에 여행지로 결정했다. 나는 혼자 여행 갈 때 꼭 책을 들고 가서 틈틈이 읽었는데, 이동할 때나 잠들기 전처럼 자투리 시간에 멍 때리고만 있으면 괜스레 외로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행지에서 책을 읽었던 장소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여행지 옆에 특정 책 이름을 붙이는 게 나만의 추억 저장법이 됐다. 예를 들어, 첫 런던은 버지니아 울프, 그리스와 베를린은 오디세이, 이런 식으로.
요크 여행을 갈 때쯤 나는 이미 영국에 머문 지 육 개월이 넘은 상태였고, 떠나온 날보다 떠날 날이 가까운 시점이었다. 그동안 보이는 서점마다 들어가서 샀던 책들이 어느덧 텅 비어있던 기숙사 책장을 꽤나 빼곡히 채웠다. 그 책들 중 요크 여행에 들고 갈 책을 고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책을 들고 갈 것이었다. 평소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자신은 이미 다 읽었다며 넘겨준 책이었다. 제목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다들 아는, 파란색 터번과 진주 귀걸이에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소녀가 있는 그림을 소재로 한 책이었다. 표지 속 사연 있어 보이는 소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서 넣은 백팩 안에 그녀를 살포시 넣었다. 그리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다리를 건너니 펼쳐지는 소도시의 전경. 커다란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거리. 크지도, 북적이지도 않다. 중세 시대에서 넘어온 것만 같은 건물들과 사이사이에 핀 노란 들꽃. 이곳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을 거라는 걸 단숨에 알았다.
새로운 지역을 혼자 여행할 때면 꼭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다. 세계와 동떨어져있는 것만 같은 느낌. 내 앞에 흐르는 강물도, 조잘조잘 떠들며 걸어가는 사람들도, 정처 없이 떠도는 비둘기들도 하나의 설정된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들. 그리고 이곳에 서있는 나는 내일이면 잊힐 사람. 내일 이후로 다시는 이 땅을 밟아보지 못할, 이 세상을 하루 방문한 사람.
내 앞의 풍경은 2023년 4월 2일에 올리는 연극이고, 나는 그 극을 조용히 관람하는 방문객의 마음이 된다. 그러면 같은 풍경도 어찌나 특별해 보이는지. 골목 서점의 좁은 계단을 오갈 때 서로 끝에 서 기다려주는 사람들과 골동품 가게를 구경하다 발견한, 어릴 적 거실에 누워 동생과 보던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피겨, 길가에 앉아 먹는 감자튀김과 콜라, 강 건너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들. 호스텔 침대의 새빨간 철제 프레임부터 하늘색 이층 버스까지 모든 사물은 소품이 되고, 모든 사람은 배우가 된다. 소품들은 각각 제자리에 놓여 내 손길을 기다리고, 사람들은 제 역할에 맞춰 움직이며 때에 맞춰 나를 스쳐 지나간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본 커플이 특히나 연극적이었는데, 여자는 커다란 장미가 수 놓인 치마에 붉은 체크 자켓을 입고 남자는 상하의를 검정색으로 맞춰 입은 커플이었다. 손을 꼭 잡고 한적한 길 위를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가다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지켜보았다. 그 남녀가 각자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서로의 손을 찾게 된 건지, 내일이면 다시는 보폭을 맞춰 걸을 일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2023년 4월 2일의 그들은 요크의 외곽지역을 찾은 어느 여행객이자 관객의 머릿속에 영원히 함께 걸어가는 연인으로 남았다.
우리는 대개 무대라는 것이 퍽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일상에서보다 훨씬 깊게 누군가의 존재에 집중하는 탓으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다고.
-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여행에서 마지막 장소로 재무장관의 집 Treasurer's Hosue을 찾았다. 집과 마당 전체가 박물관인 이곳은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예약은 못 했지만 마침 몇 분 뒤에 투어가 있어서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투어 가이드는 자원 봉사자로 이뤄진 듯했는데, 우리 투어를 맡으신 할머니는 손수 쓴 작은 메모를 들고 다니며 설명해 주셨다.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가방 속에 든 책이 현실이 되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살던 화가 베르메르의 집, 적어도 내가 혼자 상상하던 그 집과 같았다. 2층을 터서 탁 트인 공간에 바래서 상아빛을 띠는 벽. 기다란 원목 테이블과 그 위에 걸린 커다란 액자. 곳곳에 놓인 고풍스러운 원목 의자와 샹들리에, 벽에 걸린 장식품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상아빛 공간과 어우러져 사치스럽다기보단 아름다웠다. 곳곳에 뚫린 창에서 비친 빛이 빈 공간을 채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곳곳에 있는 창에서 커튼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이 집에서 소녀에게 진주 귀걸이를 주는 베르메르를 상상했다. 그라면 그림 모델에게 정교하게 비치는 햇빛과 고요한 실내 정경을 담아냈을 것이다. 부드럽고 은은한 색조가 감도는 이 집은 베르메르의 그림과 꼭 닮아 있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것은 대상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안에 늘 존재하던 미적 감각, 혹은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재무장관의 집을 들렸을 때 내 가방에 들어있던 책이 다른 책이었다면 나는 다른 배경을 읽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행지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가 아니라 읽어낼 수 있다는 기쁨 그 자체이다. 나는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에서, 스쳐 지나가는 연인에게서, 우연히 들어간 박물관에서 아름다움을 나눠 받았다. 각각 다른 형상을 한 씨앗들이 내 안에 들어와 움츠려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싹을 틔워냈다. 그 새싹들은 어딘가에서 나눠 받은, 분할된 마음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분할된 춤'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물론 단순히 공연을 보는 방식으로도 우리는 춤을 나눠 받는다. 관객이란 무언가를 나눠 받는 존재이기에. 나눠 받은 아름다움은 그의 몸과 가슴에 새겨져 영영 그만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바, 그 아름다움은 본디 그의 안에 있었다. 본래적으로 몫이 있는데도 그 몫이 없다고 상전된 이들에게 다시 몫을 주는 일을 분할이라 한다면. 춤을 나누어주는 것은 춤을 되돌려주는 일. 춤출 수 없던 몸이 춤추는 몸이 되도록. 당신의 몸이 보이고 들리게.
-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참고
Treasurer's House, York | National Trust Collections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