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란
'노스탤지어는 왜 있는 걸까?' 내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 채널, 'No Stupid Question'의 주제였다. 이 채널에서는 두 호스트가 일상 속에서 궁금해할 만한 질문과 심리학 연구를 엮어내어 설명해 주는데, 이 날은 노스탤지어란 무엇인지,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실험 심리학자 D: "나에게 노스탤지어는 유년시절과 젊은 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연결감인 것 같아. 미화된 자기 연속성(self-continuity: 과거와 미래 등 다른 시간에 있는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때 가던 음식점은 폐업했고, 친했던 친구와도 연락하지 않으니 지금은 이미 사라진 것들이 되었어. 하지만 한때 모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나의 일부가 된 거지."
사업가 M: "네 말이 맞아. 자기 연속성은 내가 만들어낸 '나'가 누군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 머릿속에서 조금 낭만화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기억들이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줘. 우리를 끌어내리는 '닻'이 아니라 계속해서 뭔가를 지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주는 닻인 거지. 그리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내가 누구인지를 되새기는 거야.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단숨에 일본인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환학생이 끝나갈 때쯤 그에게 어떤 기분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Nostalgic."
향수. 이 단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인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한순간 빠져버린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향기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인데, 프루스트가 이 과정을 어찌나 기가 막히게 묘사했는지 책을 읽는 나에게도 주인공과 같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과거의 사건과 매우 유사한 경험을 할 때 그때의 에피소드가 재활성화되는 현상을 회상(flashback)이라고 한다.
마르셀의 마들렌처럼 달달한 향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일본식 커리. 앞서 말했던 일본인 친구가 커리를 기막히게 잘 만들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자국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추억을 쌓았지만, 그중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뽑자면 단연코 커리를 먹던 '빌리지 디너'다.
빌리지 디너는 나까지 총 네 명이 매주 함께 하던 저녁 식사인데, 우리가 모두 빌리지라는 기숙사에 살아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 한국인 둘, 대만인, 일본인까지 넷이서 함께 먹던 저녁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가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분명 처음 알게 된 친구들과 같이 먹는 밥인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푸근했다. 둥근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숟가락을 맞댈 때면 한국에서 친한 친구들과 조잘조잘 떠들며 밥을 먹거나 가족들과 둘러앉아 찌개를 나눠 먹는 것 같기도 했다. 다들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이야기를 하다 자정을 넘기기도 하면서 세월아 네월아 밥을 먹었다(내가 말이 그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비밀까지 술술 풀어놓을 때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이 모든 게 꿈에서 일어나는 일 같이 아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넷은 퍽퍽한 샌드위치만 먹는 영국인들 틈에서 밥심으로 똘똘 뭉쳐 어느새 장을 같이 보러 가며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메뉴는 공교롭게도 각자가 요리한 메뉴가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 일본인 친구의 커리, 대만인 친구의 치킨수프, 한국인 친구의 짜글이와 나의 크림 스튜. 어딘가 몸이 안 좋은 날에는 마늘을 통째로 넣은 뜨뜻한 치킨수프, 매콤한 게 당길 때에는 고추장 맛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짜글이, 슴슴한 맛이 당길 때에는 부드러운 크림 스튜, 그리고 모두가 호불호 없이 최애 메뉴로 뽑는 커리까지. 어쩐지 각자의 메뉴가 그 사람과 닮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메뉴로 가득 찼던 저녁 상은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메워줬지만, 밥 숟가락을 뜨다가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게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눈앞에 있는 음식이 슬프도록 소중해졌다. 온전히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온 감각을 동원해서 내 안에 담아두었다. 관찰자가 된 기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들으며 시간의 단면을 하나둘씩 머릿속에 저장했다. 이 단면들이 모이고 이어져 내가 겪었던 하나의 서사로 엮어진다. 그리고 그 서사는 '내'가 된다.
그렇게 고슬고슬한 밥 위에 얹은 일본식 커리는 내 영국 서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팟캐스트 얘기로 돌아와서,
사업가 M: 피터팬이 웬디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어. "따스하고 신나는 생각을 떠올려봐. 그럼 저절로 몸이 뜰 거야."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따스하고 신나는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뭐든지 우린 떠오를 수 있어. 그리고 노스탤지어가 이끄는 곳에서 내리는 거야.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토대, 자기 연속성으로 이어진 기억에서.
참고: No Stupid Question "What is the point of Nostalgia?", 그레고리 번스 <나라는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