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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빈 Feb 09. 2024

폐지 더미 속 러브 스토리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같은 문장이 매 챕터마다 반복된다. 핵심 단어는 폐지 더미와 러브 스토리.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단어가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한 남자의 인생을 채운다. 


    책의 주인공 한탸는 폐지 압축공으로 일한다. 그는 몇 십 년 동안 지하실에서 홀로 일했는데, 폐지더미 속에서 가치 있는 책을 발견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다. 한탸에게 책은 일이자 취미, 유일한 친구. 즉, 책으로 온 시간을 채운다. 그가 얼마나 책에 진심이냐면 홀로 책 꾸러미를 만들어 집 화장실, 침대 할 것 없이 마구 쌓아놓았고, 책에 온전히 빠져 사색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을 정도다. 한탸는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대로 일하며 니체, 헤겔, 괴테 같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지식이나 교양을 어딘가에 이용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가르치지도, 글을 쓰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그저 혼자 사색에 잠길 뿐이다. 아, 가끔 상상 속의 친구인 예수나 노자를 만나기는 한다.


    책을 더 읽을수록 한탸의 반사회적인 면모들이 나온다. 지하실에서 일하는 그의 동료는 하수구에서 넘어온 생쥐들, 그가 자는 곳은 쓰레기 책 더미 속. 불쾌한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자세하게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탸의 삶을 끝까지 지켜보게 되는 이유는 맹목적인 순수함 때문이다. 철저하게 사회에서 소외받은 삶이지만 한탸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에 모든 생을 쏟아붓는다. 그에게는 일만 있으면 된다. 오로지 노동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 노동하는 삶. 끝없이 따지며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바라는 나에게 한탸는 바보 같지만 인간의 본원을 회복한, 위대한 자유인으로 보였다. 




* 여기서부터 스포가 될 수 있어요!

 

     노동을 통해 철학과 이성을 추구했던 한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 깨달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가치인 연민과 사랑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탸가 젊은 시절 만났던 여인인 만차가 떠오른다.

살면서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만차는 젊은 시절 똥(...) 때문에 여러 수치스러운 일을 겪지만 후에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랑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만차는 여러 남자를 만나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집과 자신의 모습을 한 천사 조각상까지 갖게 된다. 사랑을 통해 인간 삶의 토대가 되는 집을 완성시킨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탸는 만차를 찾아가는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만차 조각상을 보고 만차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크게 감명받는다.   

    

    반면 책 빼면 시체인 한탸는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만차가 이해한 것을 깨닫는다. 흔히 인간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소중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한탸의 마지막 순간 수면 위로 떠올랐던 장면은 한 집시 여자와 연을 날렸던 추억이다. 한탸는 무작정 집에 찾아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는 벽난로 앞을 차지해 버렸던 그녀를 그린다. 둘은 서로의 이름, 출신, 직업, 그 어느 것도 모르는 채 그저 끌어안고 함께 불을 쬐고는 했다. 둘이 공유한 것은 그저 함께 하는 '현재'뿐이었지만 한탸는 그녀와 함께 할 때 어느 때보다도 아늑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만남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려 한탸는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렇게 집시 여자의 이름은 한탸의 머릿속에 빈자리로 남았다. 그런데 한탸가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기억 속에 흐려져 있던 그녀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탸는 마침내 무엇이 인간의 삶을 완성시키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의 전부인 책도, 평생 함께한 압축기도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남은 것은 그저 그의 삶에 우연히 잠깐 들어왔다 조용히 사라져 버린 여자가 남기고 간 흔적. 책들 아래로 깊숙이 묻혀있던 사랑이 그를 감쌌다. 한탸는 마지막으로 책을 읽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한탸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순간 내게도 이 기묘하고도 불쾌한 남자를 향한 연민과 사랑이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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