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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Oct 21. 2020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

헤겔 변증법과 형식 논리학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들어가기 전에 


형식논리의 3대 근본 법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헤겔의 변증법 또는 변증법적 논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법칙에 바탕을 둔 형식적 논리와 비교될 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를 서술했다. 그것은 세 가지 논리 법칙을 말하는데, 그것은 현재까지도 논리학의 기초로 남아 있다. 이 법칙은 다음과 같다. 

1. 동일률 (Law of Identity): 흔히 “A는 A이다”라고 표시한다. 이는 가령 “그는 똑똑하다”라고 했으면 같은 상황에서는 이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2. 모순율(Law of contradiction): 통상 “A가 B인 동시에 B가 아닐 수는 없다”는 형태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그는 똑똑하고 동시에 똑똑하지 않다”같은 경우다. 
3. 배중률(Law of the excluded middle): “A는 B이거나 비(非)B 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라는 꼴로 표현된다. 즉, “그는 똑똑하거나 똑똑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점에서는 형식논리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이 보인다. 더욱이 그는 형식논리의 법칙을 정말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모든 작품이 변증법적인 것은 아니며, 오직 그의 '논리학'과 '정신현상학'만이 진정으로 변증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신현상학>의 '의식'장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정신현상학>은 인간의 마음이 초보적인 단계부터 최종 단계까지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는 철학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를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계는 또한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i. 감각적인 확실성 
ii. 지각
iii. 힘과 오성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와 헤겔의 <정신현상학>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대화에서 보듯이 인간의 정신은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의 형태는 1) 지각-지식으로부터 2) 판단-지식 그리고 3) 추론-지식으로 형태가 변화, 발전되어 간다. 마치 초등학교 수준의 지식에서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수준의 지식이 있는 것과 같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역시 이런 지식의 성장, 발전을 다루고 있는데 두 철학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지식이 발전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풀리지 않는 어려운 상황, 아포리아에 봉착하는 반면 <정신현상학>은 지식 탐구가 그 최종 목표인 절대지(絶對知)에 도달한다. 

Absolute Knowledge, Das Absolute Wissen “절대지(絶對知)”란 의식이 경험적 지식을 넘고 과학적, 예술적, 종교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만나는 지식의 완성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시 다루겠다. 


루소의 <에밀>에 나와 있는 “지성”, 즉 “나의 적극적 능력과 주관과 객관을 서로 연결시키는 헤겔의 변증법


감각적-확실성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사보이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어느 정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에밀>에서 주인공(=루소)은 그 시대에 철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우선 루소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 원칙에 동의한다.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뚜렷하고 명백하다. 의심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 곧 경험과 감각의 세계를 의심했다. 


그러나 루소는 데카르트와 같이 감각으로서의 자신의 외부세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나의 감각은 나와 마찬가지로 내면적이기 때문에 “나”만큼 뚜렷하다. 이 점에서 루소는 버클리의 '존재는 지각이다(esse est percipi)'를 따라간다. 따라서 루소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나'와 나의 감각(세계, 물질)은 동등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감각(세계, 물질)에 영향을 주거나 파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는 감각적인 것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루소는 생각했다. 그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성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A와  B를 비교하여 A가 더 크다” 혹은 “A가 몇 개 있다” 등의 판단은 감각이나 대상 쪽이 아니라 나의 지성 능력에 있다.   
 
좀 더 말하면 인간의 지성은 감각에 의해 주어지는 인상들을 비교하고 결합하는 능력을 산출한다. 

“생각하는 나”와 감각(=외부세계)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루소의 생각은
실로 독일 관념론 전체의 비밀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생각하는 나”와 감각(=외부세계)의 연관성을 '선험적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라고 해석했다. 피히테는 아(我)과 비아(非我)의 상호작용에 관한 이론을 창안했다. 

이런 점에서 헤겔도 인식 과정에서 자아의 적극적인 기능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헤겔은 지성과 감각을 분리하지 않고 매개라는 말을 썼다. '매개(Vermittlung)'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 침투하고 서로 지양되는 과정이 매개다. 이는 우리의 대화나 다툼 등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과정과 흡사하다. 
두 사람이 서로 오해를 해서 싸우다가 서로의 잘못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매개”와 같다. 매개를 통해서 인식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현상학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지식은 “감각적 확신”인데 이 단원의 정식 명칭은 “감각적 확신 혹은 이것과 사념(思念)”이다.


헤겔은 가장 낮은 주관의 단계, “감각적-확실성”으로부터 진리의 여정을 시작한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같은 상태다. 

“감각적 확실성”은 모든 사람이 믿는, 가장 일반적인 지식의 개념과 유사하다. “감각적 확실성”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많은 사물들로 가득 차있고 나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때 나와 사물은 둘 다 독립적이다. 

또한 “감각적 확실성”의 세계는 무한히 풍부한 물질과 사물들의 세계다. 예전 김우중 대우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한말 기억나는가? 이게 바로 “감각적 확실성”의 세계다. 


감각적인 확실성의 세계에서는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나와 세상의 분리,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전제 조건으로, 주체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헤겔은 "즉각적이다" 혹은 “순간적이다”라고 부른다.     

“감각적-확실성”은 사물에 대해서 즉각적인 지식을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감각적-확실성의 눈 앞에 놓인 대상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이것", "여기" 그리고 "지금" 등이다. 그러나 이런 즉각적인 사고방식은 그가 믿고 있는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순간적(즉각적)으로 파악된 진실은 그러나 곧 인식의 현장을 빠져나간다.


이런 경험을 현실에서도 흔히 경험하게 된다. 내게는 그 순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인데 이를 상대에게 씩씩거리며 퍼붓자 곧 오해임이 밝혀지는 경우를 본다. 예를 들어 “너 이거 먹었지?”라고 상대를 다그치는 그런 경우와 흡사하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즉각적인 지식” 혹은 감각적 확신과 유사하다.  

"지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예를 들어 "지금은 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감각적인 확실성의 진리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만약 '지금'이 대낮에 우리가 밤에 써놓은 이 문장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다소 케케묵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95 단락) 

이런 방식의 검사를 통해 감각적-확실성의 진실은 믿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감각적-확실성의 실패는 순간적으로는 절망을 가져 오지만 이전 과정을 취합함에 따라 긍정적인 결말로 귀결된다. '이것', '지금', '여기' 등이 가리키는 대상은 사라졌지만 그 개념 혹은 보편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혹은 문법적으로 말해서 명사로서의 '이것', '지금', '여기' 등은 남는다.


가령 아이들에게 이런 단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보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이 장난감 혹은 이 과자 등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라는 대명사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 단어의 사용 방법과 의미를 가르친다. 이처럼 말(언어)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간적)이다. 말로써 사실을 나타내고 판단하고 비교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처럼 인간적인 언어로서 객관적인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매개”의 뜻이다. 


“지금은 밤이 아니라 낮이다”라는 언어 사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것], [지금] 또는 [여기]의 개념들은 대상이 아닌 주체(혹은 언어 사용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주체와 대상의 매개를 말한다. 헤겔의 매개(Vermittlung)란 주관적인 관념이 객관적인 감각에 투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법, 지양 및 부정의 개념


감각적-확실성의 분석에서 헤겔은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라는 말로써 낮이나 밤을 지시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개별자들이 보편적인 개념 안으로 포섭된다는 사실이다. 
헤겔은 이 내용을 좀 독특하게 표현한다. 감각적-확실성의 진리는 파괴될 뿐만 아니라 실은 높은 단계, 즉 보편자 속에서 보존된다고 말한다. 밤은 한낮으로 바뀐다. 개별자의 진실은 부정된다. 하지만 밤도 지금일 수 있다. 감각적-확실성의 내용은 어느 순간에서 파괴되지만 보편적 개념으로 보존된다. 이리하여 지양(止揚)의 개념이 나타난다.         


 지양(止揚)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파괴
 2. 보존하다
 3. 고양(高揚)시키다

이들이 결합될 때, 지양(止揚)의 개념은 즉각적인 내용의 파괴와 그것의 높은 수준에서의 보존에 있다. 파괴의 측면을 헤겔은 부정(Negation)이라고 한다. 감각적-확실성의 믿음은 즉각적인 내용을 부정되면서 그 힘을 상실한다: 그러나 “밤” 역시 “지금”일 수도 있고, 보편 개념의 한 부분이 되면서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부정”이란  인식의 상위 단계, 즉 보편적 단계를 형성하기 위한 경험의 반대 방향의 움직임을 말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확실성”의 진리는 보편적 존재로 나타난다. (예: 물질과 그 속성)  
 

그러나 보편자 역시 부동적인 실체가 아니다. 반대로 보편자란 눈앞의 순간들을 부정하고 또 긍정하는 전체 과정이다. 헤겔은 이런 변증법적 순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각적-확실성의 변증법은 그 운동의 단순한 역사(즉, 경험)에 지나지 않으며, 감각적-확실성 그 자체는 단지 이 역사일 뿐이다. (헤겔, <정신현상학> 109 단락)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의 본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형식적인 논리와 모순되는지를 말한다. 헤겔이 파악한 보편의 개념은 형식논리의 두 번째 법칙, 즉 모순율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 같이 보인다. 보편성은 부정과 긍정 모두를 자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변증법은 형식논리학의 모순율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순율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을 수는 없다. 어떤 진술도 동시에 진실이고 또 거짓일 수는 없다.


변증법이 가지고 있는 부정(否定) 개념은 모순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으나 그들을 동시에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에 실은 모순율의 위반이 아니다. 변증법은 위에서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어떤 것이 대립자로 이동하는 운동이고 역사라고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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