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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Jul 14. 2022

노자 도덕경 1장 해석

노자의  도는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1장 해석 (철학의 항해 No. 71)

1. 전통적인 노자서(老子書) 1장 해석 비판

중국 고래의 철학서인 노자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문화의 큰 뿌리를 형성해왔다. 소위 유불선(儒佛仙) 3교라고 하여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유교, 불교와 더불어 도교라는 종교를 형성하여 민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원한 사랑을 받아왔다.

이런 맥락에서 유명한 노자서 1장, 즉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을 풀이해 본다.

전통적 해석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모두가 불교의

불립문자 (不立文字)식으로, 즉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학자들의 해석을 보자.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부분만 살펴본다.

(1) 말로 표상(表象)해 낼 수 있는 도는 항구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다. (장기근 번역)

(2) 도를 도라고 부르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김용옥 번역)

(3)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 (최진석 번역)

등이다.

그러나 필자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도(道)는 도(道)로서 부를 수 있으나 한정된 도(道)는 아니다.


한정된 도(道)란 유한한 도(道)와 같은 뜻이다. 결국 도란 무한하다 란 뜻이다. 단 이 때 무한이란 공간적, 시간적 무한 혹은 양적, 수학적 무한이 아니라 “질적 무한” 곧 “대립자의 통일”을 말한다. 달리 말해 이는 “변증법적 무한” 개념이다.

(시비, 선악, 미(美)와 추(醜) 등)


위에서 본 전통적인 노자서 1장 해석은 도(道)란 언어화, 개념화가 안된다 는 식이다. 명(名)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도 일면의 진리는 가지고 있다. 보통의 방식으로는 도를 표현하거나 개념화할 수 없다 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로 표현 못한다거나 개념화시킬 수 없다 등의 해석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도덕경은 온통 도(道)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 :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도충이용지 혹불영) : 도의 본체는 공허하다.

그러나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등. 따라서 기존의 도덕경 1장 1절 해석은 잘못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 사유가 좀 미흡하다 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도 즉 절대자는 말과 글로 표현 가능하다, 개념적으로 파악가능하다. 단지 형식논리학적인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학으로는 이것이 설명이 된다.


문제는 비상도 (非常道) 할 때 그 상(常)자의 해석이다. 필자는 이 상(常)자를 “규정된” 혹은 “한정된” 혹은 “고정된” 혹은 “개념화된” 혹은 “객관적으로 인식된” 등으로 해석한다. 이는 결국 “형식논리학적인” 이라는 말과 같다. 형식논리학이란 A=A 라는 동일률과  ~(p⦁~ p) 라고 표기하는 모순률 등이 지배하는 사유를 말한다. 이는 모든 인간의 언어와 사유의 기본이다.


2. 장자의 도(道) 개념

장자(壯者)의 도(道)에 대한 단언적인 표현은 장자서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부도미시유봉(夫道未始有封)

이다. 즉 도란 한계가 없다. 한정할 수가 없다. 도는 무한하다. 인간의 지식으로 표현이 안된다. 도에는 타자가 없고 울타리가 없다. 도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게 바로 부도미시유봉 (夫道未始有封)이다.



울타리로 둘러 쌓인 영토를 봉(封)이라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무한자에는 대립자가 없다는 말이다. 만약 도(道)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다. 이런 것이 또한 노자의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라는 구절이 이해된다.

夫道未始有封(부도미시유봉) : 무릇 도는 한계가 없는 것이고

言未始有常(언미시유상) : 말에는 고정된 내용이 없는 것이다.

이는 도 즉 절대자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글이다. 유한자를 통해서 도를 표현할 수는 없다. 가령 공자처럼 (증자) “나의 도(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 충서(忠恕)”

라고 할 때 이런 것이 바로 장자가 비판하는 한계가 있는 도(道)이다. 이럴 경우 그 반대 즉 “충성스럽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속성은 도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자연주의 철학에서 볼 때 충성과 불충 모두 도의 속성에 속하고 그 외에 다른 속성도 있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는 도를 규정할 수 없다. 그나마 좀 덜 나쁜 방식이 바로 대립자의 종합 이라는 방식이다. 즉 “대립자의 상호의존” 및 “양자 포섭” 즉 “이것도 저것도” 옳다 하는 것이 불완전 하나마 도를 나타내는 바른 방식이다. (시비. 미추 선악이 같다. 사람들의 구분이다.)



3. 명(名)의 문제 : 도(道)의 속성, 인식, 개념

노자 1장 1절의 후반부는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이다. 명은 도의 이름 혹은 도의 개념화 (객관적 인식)을 말한다. 위의 장자 텍스트가 말하는 것처럼 노자의 명(名)은 장자의 언(言)과 같다. 굳이 말하자면 명(名)은 절대자의 속성과 같다. 명(名)은 절대자의 개념적 표현이다. 그래서 상명(常名) 즉 한정된, 규정되는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상명은 다시 상무(常無)와 상유(常有)로 나누어 진다. 그냥 무(無)와 유(有)라고 해도 되지만 노자가 굳이 상무, 상유 라고 한 까닭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와 유는 개념화,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③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와 속성 이론과 장자, 노자의 도와 명의 관계는 비슷하다. 단 차이점은 스피노자의 절대자는 그 속성(attributes)이 연장(extension)과 사유(thought)인데 비하여 노자의 도의 속성(屬性)은 무(無)와 유(有)이다.



4. 무(無)와 유(有) : 절대자의 무한적 속성



노장철학의 핵심 개념 도(道)에 대해서 약간만 부연설명한다. 노자의 도는 절대자 혹은 신과 같다. 장자는 종종 이를 조화자(造化者)이라고 불렀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과 비슷한 표상이다. 노자는 장자와 달리 도에서 인격적인 표상을 배제하고 오직 논리적, 개념적으로만 기술한다.

①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②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③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④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⑤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위의 설명과 더불어 노자서 1장 2절을 살펴보자.

②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 무는 천지의 시초이고 유는 만물의 근원이다.

이제부터는 도의 객관적 속성이 나온다. 그것은 두 가지 즉 무와 유이다. 이를 굳이 상무와 상유라고 한 까닭은 위에서 밝혔다. 도와 달리 무와 유는 한정적으로, 객관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원래 도란 것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절대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의 속성 즉 무(無)와 유(有)는 인식가능하다. 하여간 이게 노자의 생각이다.

②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의 해석은 이렇다. 무가 우주의 출발임을 말한다. 절대적인 시원이라고 하겠다. 그 반면 유는 자연과 만물의 생산 원인임을 밝힌다. 이 부분을 장자는 조화자(造化者) 라고 한다. 사실 유와 무의 문제 역시 장자(壯者)서 제물론(齊物論)에서 이미 다루어 진 것인데 노자가 무와 유에 대한 그의 스승의 자유로운 사상을 체계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③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그러므로 항상 무에서 오묘한 도의 본체를 관조해야 하고 유에서 광대무변한 도의 운용을 살펴야 한다. (장기근 번역)


필자의 해석은 : 노자는 무를 도의 통일성 혹은 그냥 일자성으로 보고 유를 도의 다양성으로 연결한다는 점이다. 妙와 徼의 차이 및 구별이 있다. 하여간 무(無)와 일(一)을 연결하고 유(有)와 다(多)를 연결하는 노자의 발상이 재미있다.

④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⑤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무(無)와 유(有)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요 오직 이름만 다르다. 이 둘은 다같이 유현(幽玄)하다. 이들은 다같이 유현하고 또 유현하며 모든 도리(道理)나 일체의 변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장기근 번역)

결국 도란 무와 유의 변증법적인 통일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와 유가 한 뿌리에서 나온다 즉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 도(道) 라는 실체이다. 절대자 혹은 신은 눈에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한다. 성경에도 “기묘자 모사”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신의 존재는 신비하다. 장자와 노자는 이를 나름대로 보고 철학을 서술했다. 위대한 동양철학의 뿌리이다.


유튜브 강의


https://youtu.be/v7ZSbrsM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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