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중세 철학은 흔히 스콜라 철학이라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결합이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다 실존 (existence)과 본질 (essence) 이란 새로운 범주를 도입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이런 토미즘은 현재 천주교의 공인 철학이다.
실존 = 있음, 본질 = 무엇
가령 “핸드폰이 있다” 라고 할 때 핸드폰은 본질 있다는 실존이다. 주어 + 동사(be동사) There is a boy. 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과 있음
② 실존과 본질이란 범주는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소개를 통해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 라는 주장을 통해서 실존주의 사상을 정초한다. 즉 사물의 경우 예를 들어 연필 같은 경우 그 본질이나 목적 즉 필기가 먼저 있고 그 때문에 만들어 진다. 즉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그 본질 혹은 목적보다 실존이 앞선다. 즉 인간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가는 자유 존재라는 의미이다. 본질은 “존재이유” 혹은 “존재의미” 라고 할 수도 있다. 흔히 왜 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때 왜에 해당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③ 실존/본질 개념은 실은 고대 및 중세 1000년 이상 그리고 현재까지 사용되는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쌍은 중세 철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개념이다.
토마스와 스콜라 철학의 실존/본질은 실은 아랍의 철학자 아비첸나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c. 980 ~ 1037) : 원래 아랍인이며, 아랍의 원래 이름은 이븐 시나(Ibn Sīnā)이다. 하지만, 흔히 라틴어화 된 이름인 아비첸나(Avicenna)로 더 알려져 있다.
④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40번이나 보고 또 암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실존과 본질(existence & essence) 개념을 통해서 존재자의 구성을 풀이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즉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오동 나무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것과 그런 나무가 (현재)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개별자를 의미하는 제 1실체와 보편자를 의미하는 제 2실체로 구별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가 제 1실체이고 사람이 제 2실체이다. 제 2실체는 종(種)과 류(類) 등이 있다. species & genus. 또 소크라테스는 희다(white) 혹은 크다(big)라고 할 때 흼(whiteness), 큼 등을 속성이라고 한다.
제 1실체 즉 개체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지식 즉 학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 인식은 모두 보편자에 관한 것이다. 지식은 또한 불변적인 지식이어야 한다. 개별자에 대한 지식은 모두 변한다. 예를 들어 지금 “소크라테스는 아프다” 하고 하자 그러나 몇일 지나면 이 지식은 거짓이 된다. 보편자가 곧 본질에 해당한다.
⑥ 아리스토텔레스도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다 본질(τὸ τί ἦν εἶναι) 은 불완전(imperfect)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Aristotle’s Essence: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이는 영어로 what something was to be 라틴어로 quod quid erat esse 이다. 불완전 과거는 한 때 어떠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 그런 시제를 말한다. 즉 본질이나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해당하는 실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 다이아몬드 산, 우리 집 안에 있는 금 송아지, 피닉스 등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의 본질 혹은 본성은 그 사물 즉 개별적인 존재자가 현재는 없더라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 오동나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오동나무의 본성 혹은 지식은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을 불완전 과거 시제로 표시한 것이다. 이런 현재 존재 혹은 내 앞의 존재 혹은 실제로 있는 것 등을 지시하기 위하여 아비첸나는 실존 이라는 범주를 사용한다.
⑦ 토마스는 실존 대신 그냥 존재(being, esse)라는 말을 더 많이 즐겨 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비첸나의 실존과 똑 같다.
⑧ 아비첸나의 존재 분석 : 우연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 우연적 존재는 실존과 본질의 합이다. 즉 그 실존(존재)의 원인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우연적 존재자(contingents) 가운데 실존 (wujud, existence)와 본질(mahiyya, essence)을 구분한다.
# 인간 역시 실존을 만들 수 있다. 창조와 노동 등
그러나 아비첸나는 필연적 존재자를 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는 신 플라톤주의자 이며 유출설을 신봉한다.
신은 실존의 원인이며 최초의 원인이다. 유한자는 그 실존을 최초의 존재자 즉 신으로부터 얻어 온다. 신은 본질이 없고 실존 뿐이다. 아니 신의 본질이 바로 실존이다. 그러나 이말은 신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말한다.
그 이유는 : 그는 창조를 유출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신 속에 있던 본질 혹은 각종 형상 등이 존재를 입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들을 실존시키는 것이 창조라는 말이다. 즉 아비첸나의 신플라톤주의 유출설과 기독교의 창조설을 합친 것이다. 단 무로부터의 창조는 아니다.
인간의 영혼(지성)은 개별자의 직관 속에서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단 영혼의 현실성(actuality) 상태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