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품 어떤 내용이야?"
책이나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흔히 묻는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당장에 부딪히는 의문이 있다. 줄거리를 묻는 거야 의미를 묻는 거야.
'내용'이라는 단어를 써서 물었으니 그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묻는 것만 같다.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대개 '줄거리'가 뭐냐고 물을 테니까.
그러나 어디에 비중을 실어 물었든 간에 보통의 경우는 둘 다 궁금해 하는 것이므로 둘 다 대답해 주어야 한다. '어떤 인물이 무슨 일을 겪는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식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짧게 요약한 몇 마디로 그 작품을 총체적으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 작품의 줄거리가 무엇인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누군가 이 작품의 내용이나 줄거리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한 노인의 도전과 허무를 그린 작품이야.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큰 고기를 잡기 위해 먼바다로 나간다는 이야기야.
-한 늙은 어부가 먼바다로 나가 커다란 고기를 잡는다는 이야기야. 도전하는 삶을 표현한 작품이지.
-가난하고 늙은 한 어부가 먼바다에서 잡은 거대한 고기를 상어에게 다 뜯긴다는 내용이야.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먼바다로 나가는 도전을 통해 마침내 큰 고기를 잡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모두 뜯겨서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모두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씩 다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여러 가지 줄거리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줄거리니까 짧은 것이 좋다. 길게 늘이면 늘일수록 디테일하고 다양해지겠지만 줄거리의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질 테니까.
이야기에는 대개 기승전결이 있고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양한 줄거리를 제시할 수도 있다.
-가난하고 늙은 어부가 고기를 못 잡아서 궁핍하게 사는 이야기.
-주인공이 궁핍하게 살며 먼바다로 나가 큰 고기를 잡는 도전을 하겠다는 포부를 품는 이야기.
-노인이 어렵게 먼바다로 나가지만 고기를 잡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이야기.
-노인이 마침내 뜻한 대로 큰 고기를 잡아 인생 역전의 기쁨을 만끽한다는 이야기.
-노인이 잡은 고기를 싣고 갈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배 옆구리에 묶어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
-노인이 달려드는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잡은 고기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
-노인이 항구에 돌아오니 잡은 고기가 뼈만 남아 있더라는 이야기.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작품의 줄거리와 의미를 달리 제시할 수 있다. 어느 부분에 비중을 두든 이 이야기는 멋진 인생의 비유임에는 틀림없지만 독자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각각 다를 것이다.
나는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줄거리를 바라보고자 한다. 모든 단계의 줄거리가 각각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창작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단계는 '인물이 막 길을 떠나는 부분'이다. 이는 행동을 시작하고 일을 도모하는 단계이고,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단계이며, 미지의 세계로 한 발짝을 내딛는 단계이다.
인물이 막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그 전과 그 후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구성상 그것을 만들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물은 그전에 어떤 욕망과 질곡을 겪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 진행된 뒤에는 당연히 끝이 있을 것이고. 파멸하든 위기를 극복하든 마음을 고쳐 먹든 간에. 그러므로 인물이 행동을 개시하는 이 순간이 창작을 위한 줄거리로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모든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작자의 눈으로 보자면 '노인과 바다'는 '늙은 어부가 큰 고기를 노리고 먼바다로 떠나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만 만들면 앞뒤 이야기를 엮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노인은 왜 큰 고기를 노리고 먼바다로 떠났을까? 생활이 궁핍했기 때문이고 베테랑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이고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앞 부분은 노인의 궁핍한 삶, 베테랑으로서의 자부심, 노인의 도전적인 성격을 드러내면 된다. 그리고 노인이 먼바다로 나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기를 잡지 못해 허탕치고 망망대해에 떠서 울게 할 수도 있고 잔고기만 잡아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꼭 고기를 잡아야만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고 풍랑을 맞아 장렬하게 죽게 할 수도 있다. '모비딕'의 경우가 장렬한 죽음을 선택한 작품이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마침내 노인이 큰 고기를 낚는 데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상어에게 뜯겨 허망함을 느낀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먼바다에 나가 전문가답게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채비를 차려놓는 장면과 지루한 기다림과 배고픔과 햇볕에 시달리는 장면을 묘사했음은 물론이다. 큰 고기를 낚았을 때의 성취감과 희열을 배가시키기 위해서이다.
헤밍웨이가 '모비딕'의 에이허브 선장과 같은 장렬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노년의 인생을 그리기 위해서였으리라. 헤밍웨이는 인생이란 잡은 물고기 뼈를 허무하게 바라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작품의 하일라이트는 주제를 담은 마지막 부분이지만 창작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출발이 중요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어떤 작품이든 인물이 최초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창작에서는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최초의 한 발자욱이야말로 시작과 끝을 예고하는 혁명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