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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생담 Mar 03. 2022

문득 씨와 친구

십분발휘 짧은 소설 공모전 당선작

문득 씨와 친구


정제광


친구는 오지 않을 것이다. 문득 씨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는 이제 이 나라에 없으니까. 하지만 문득 씨는 문득 친구가 저 덜컹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올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기 전에는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겠지? 계단 밟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텅 빈 골목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테고. 어쩌면 골목 입구에 누워 있는 맨홀 뚜껑을 밟아 소리를 낼지도 몰라.

하지만 문득 씨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골목 밖에 있는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서 친구가 어느 길로 오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친구는 매번 다른 길로 문득 씨네 집에 왔을 것이다.

친구는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녔다. 자기 집에 있다가 곧바로 문득 씨에게 놀러오는 날도 있었지만 엉뚱한 곳에 돌아다니다가 들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느 날에는 기차역에 있다가 오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교회당에, 또 다른 날에는 병원 응급실에 앉아 있다가 오기도 했다. 좀 멀리 떨어진 부둣가에 가서 갯비린내를 묻혀 가지고 오는 날도 있었다.

문득 씨는 그런 친구가 좋았다. 그냥 좋았다. 왜 좋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겉보기에 두 사람에게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같이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살아 온 곳도 달랐으며 좋아하는 것이나 하고자 하는 일 따위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누군가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엿보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왜 저들은 저렇게 따분하게 앉아 있을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문득 씨와 친구는 그저 말없이 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들은 종종 따로따로 앉아서 책을 보거나 손장난을 치거나 기타를 퉁기곤 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무언가에 대해 묻고 답하거나 함께 밖으로 나가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물론 밤 깊은 공원 벤치에 앉아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다. 신변의 작은 일들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줄곧 친구의 생일이 언제인지, 친구가 어디에 살았는지, 어제는 무슨 일을 했고 안경은 언제 바꾸었는지 따위의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씨와 친구는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

바닷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나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다른 나라로 가서 세상의 씨앗에 관해 공부하고 싶어. 그것을 공부해서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싶어.”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여기에 남아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볼 거야.”

“그래. 좋아.”

그렇게 말한 뒤 두 사람은 바다에 대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그때 친구가 부른 노래 가운데에는 그가 가고 싶어한 나라의 노래도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친구는 떠났다. 그리고 문득 씨는 친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차피 한 나라 안에 살 때도 자주 만나던 친구는 아니었다. 생각나면 만나고 생각나지 않으면 만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생각나는 때도 있었고 일 년이 넘도록 생각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문득 씨는 친구를 잊은 채 결혼을 하고 친구를 잊은 채 이를 닦고 친구를 잊은 채 잠을 잤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문득 씨는 문득 친구가 보고 싶었다. 햇빛 쏟아지는 거리의 상점 앞에서 그 옛날 친구가 바닷가에서 부르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손바닥만 하게 돋아난 새싹들이 가로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문득 씨는 그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친구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친구 옆에 앉아 있고만 싶었다. 하지만 친구는 멀리 다른 나라에 가 있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문득 씨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적어 놓았던 주소와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문득 씨는 자신의 소홀함을 따갑게 후회했다. 왜 그토록이나 친구의 신상에 관해 무관심하게 지냈는지 새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득 씨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전화나 편지가 아니라 친구 곁에 있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고는 곧 다시 친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 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어느 가을날이 되었다.

친구에게서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나 집으로 돌아왔어.”

“언제?”

“어젯밤에.”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된 친구는 이제 우리 나라로 돌아와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알아보고 나서 조만간에 아주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 잘됐다.”

친구가 곧 돌아올 거라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지만 문득 씨는 태연하고 묵묵하게 그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친구와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구나. 잘됐어. 아주 잘된 일이야.’

친구는 잠시 돌아갔다가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이삿짐을 싸들고 아주 돌아왔다.


그 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해였다. 함박눈, 싸락눈. 가루눈……. 온갖 눈이란 눈이 사나흘이 멀다 않고 내려 거리에 쌓였다. 문득 씨는 친구가 돌아오면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둘 다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다. 문득 씨는 사람의 마음을 찾아내 글로 옮기느라 분주했고 친구는 연구실에서 세상의 씨앗을 분리하고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득 씨와 친구는 이제 따분해할 시간이 없었다. 함께 방에 앉아 책을 보거나 손장난을 치거나 기타를 퉁길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변함없는 친구였다. 서로 상대방이 무슨 공상을 했었는지 어떤 기억을 함께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밤거리를 걸었다. 눈이 쌓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따라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친구야. 너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니?”

“글쎄. 지금 갖고 있는 기억들을 버리고 가라면 돌아가지 않겠어.”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씨도 덩달아 밤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함박눈이 둥근 원을 그리며 얼굴 위로 떨어졌다. 친구의 그 대답은 문득 씨 자신의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문득 씨는 친구가 많이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했다고 생각했다.

항구의 불빛을 내려다보던 문득 씨는 궁금해졌다. 친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문득 씨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다녀왔다는 먼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문득 씨는 몰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친구가 공부하고 왔다는 그 ‘세상의 씨앗’이라는 것에 관해서도, 친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연구하는지도 문득 씨는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친구가 먼 곳을 말했지만 지금은 가까운 곳을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두 사람이 나뭇잎을 바라보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바다를 내려다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득 씨와 친구는 다시 언덕을 내려왔다. 큰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다 내려와서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인사했다. 문득 씨는 집으로 가고 친구는 연구소가 있는 이웃 도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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