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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세계는 있어야만 해

by 세준희

(일기 발췌)


사후 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죽고 나서 딸을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딸이 너무 보고 싶다. 사후 세계는 있어야만 해. 그곳이 이곳보다 더 좋을 것 같아. 네가 없으니까 나는 방향을 잃었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가라앉고 싶어. 그런데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너로 인해 나와 세상이 이로워졌다고 말해야 하거든. 그렇게 만들어야 하거든. 그걸 목표로 정했으니까 그렇게 만들려면 내가 그냥 죽어버리거나 죽은 것처럼 살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나야 하고 다시 방향키를 잡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냥 아무 힘이 없어. 아무 의지도 의욕도 없어. 그냥 가라앉고 싶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뿐이야. 어떻게 하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죽는 게 아니면 어떻게 너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나를 조종하고 있는 예전의 나는 내가 아니야. 그게 누군지 나는 모르겠어. 그 사람하고 접점을 찾아야 할 텐데 무슨 접점이 있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접점이 뭐지? 의사가 되어야겠다. 의사가 되어서 너를 앗아간 유전자에 대해 연구해야겠어. 나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아니, 다른 아이를 낳을까? 만약에 다른 아이를 가졌는데 같은 유전병을 가졌다면? 그럼 나는 그 아이를 낙태할 수 있을까? 유전병을 가진 내 딸을 만나서 그렇게 행복했는데, 유전병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를 낙태할 수 있을까? 만약에 낙태하지 않는다면, 너와 함께 겪었던 일을 또 겪는건가?


엄마가 된다는 건 내 힘을 벗어난 다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것. 엄마가 되면서 아이를 자신보다 사랑하게 되어 놓고 그 아이를 빼앗겨 버렸다.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었다면. 이제 나는 비어버렸다.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방향도 없다. 나는 아직도 많은걸 가진 삶을 갖고 있지만 그 삶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필요 없다.


잠을 자면 항상 악몽을 꾼다. 모든 꿈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는데 그 앞에서 무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꿈이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살릴 수 없었던 병원에서 살고 있나 보다.


너의 존재만으로 행복했던 그때가 그립다. 희망으로 가득 차서 두려웠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은 두려움도 없다. 네가 있던 자리, 희망과 행복과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공허가 있을 뿐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들이 많은데 나는 아무 의욕이 없이 가만히 앉아있다. 일은 할 수 있어도 첫째에게 감정적으로 사랑을 줄 수가 없다. 나를 불쌍해하느라 첫째에게 감정적으로 헌신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못났다.


살아야 하는데.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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