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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 May 10. 2023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말

애인과의 데이트 일상1


지난 주말에는 남자친구와 야외 좌석이 아늑한 서울 외곽 카페에 다녀왔다.


볕 좋은 곳에서 함께 독서를 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고, 각자 준비한 책을 펼쳐 애써 독서에 집중했다.



내가 준비한 책은 핸드폰에 설치된 밀리의서재 앱으로 읽고 있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준비한 책은 김선희의 '어른을 위한 청소년의 세계'였다.




남자친구는 그냥 중학교 교사라는 말로 부족한, '열혈' 중학교 교사다. 다음날 수업과 조회 준비는 물론, 반 아이들과 즐기는 소소한 (마니또 같은) 이벤트까지 준비하느라 매일 밤 11시 넘어서까지 일하는 참 교사. 머릿속에 '교사로서의 책임감'이 가득 차 있어 퇴근 후 나와 통화할 때도 신경 쓰이는 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아이들 교육과 상담에 대한 헛똑똑이 지식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남자친구에게 최근 고민이 생겼다. 반 애들 중 아픈 손가락인 한 아이 때문이다. 조퇴를 밥 먹듯이 하고, 아프다며 결석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교우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이와 상담을 아무리 진행해도 차도가 없었다. 답답했던 남자친구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아이에게 선물해 주면 좋겠다' 하면서 청소년 도서를 읽기도 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교육 지침서와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가져온 '어른을 위한 청소년의 세계'는 후자에 속한다. 선생님이자 어른으로서 아이들과 대화할 때 바람직한 행동 등을 엮어둔 책으로, 특히 '공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남자친구가 한참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읽더니, 불쑥 말을 건넸다.




"충조평판이 무엇인지 알아?"


"음... 아니?"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줄인 말이래."


"책에서 아이들과 상담할 때 충조평판을 하지 말고 공감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공감만 하는 것만으로 상담이 되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돼."




아이들에게 어떤 말과 조언을 해줄지 밤잠 줄여가며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는 '열혈교사'에게 '공감'만 하라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였나 보다. 나는 어떤 말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대화를 이끌어내는 방향이 달라지므로 공감만으로도 충분히 상담이 가능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눈치.




"오은영 교수님도 상담할 때 공감을 하시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 그분은 판단을 내리시던데."


"그분은 의사잖아."


"그런데 이전까지 그 아이와 상담하면서 공감과 이해를 많이 해주지 않았어? 어떤 식으로 상담했는데?"


"물론 공감을 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듯 조언을 많이 했지."


"이전까지 조언을 많이 해서 상담했는데 큰 도움이 안 됐다면, 책에서 말하는 대로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공감만으로 충분하냐는 남자친구의 질문에 더 좋은 대답을 하기 위해 아이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연달아 물었다. 남자친구에게 더 명쾌한 해답을 주겠다는 각오로 더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설명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친구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결국 남자친구는 표정을 굳힌 채 특유의 생각이 많아진 표정을 하며 마저 책을 읽자며 대화를 흐지부지 끝맺어버렸다. '아차, 내가 또 T 버릇 못 버리고 잔소리만 잔뜩 해버렸구나' 싶었지만, 이럴 때 더 말을 걸면 남자친구가 고장 나는 것을 알기에 가만히 두었다.




그렇게 몇 분의 어색한 침묵이 지났을까, 남자친구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 충조평판을 왜 하면 안 되는지 깨달았어."


"?? 왜?"


"내가 너의 조언을 들어보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는 생각이 들고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고. 반대로 그 아이도 나와 이야기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 상담할 때 확실히 충조평판을 줄이는 게 맞는 것 같아."




20분간을 남자친구의 성공적인 상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떠들었더니, 결론이 '네 조언이 듣기 싫었던 것 보니까 조언하면 안 되겠다'라니. 조금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침묵하는 동안 있었던 얇은 긴장감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맞아, 그게 사실 내 큰 그림이야. 몰랐어?"


허탈한 결론에 나도 가벼운 농담으로 응수했다.




책은 한 10분 읽었는데, 20분 떠들다 잠깐 어색해지고, 다시 시시한 농담으로 마무리한 지난 주말 보통의 데이트.






어떤 사람은 조언을 하는 이유가 다 그 사람을 아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말한다.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시해버리지, 애써서 조언하지 않는다고.


'너를 아끼니까/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문장이 딱 그런 맥락이다.




섣부른 충고와 조언에는 상대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해왔는지에 대한 속마음이 숨겨져 있다.


듣는 사람은 조언을 들으면서 그 말에 담긴 상대방의 속마음을 엿볼 수밖에 없고, 쉽게 상처받는다.




나와 가깝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일수록 충고와 조언, 평가와 비판은 고이 접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묶어둬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쉽게 만나지만, 나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사람은 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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