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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 Jun 01. 2023

선물 센스 없는 남자친구

꽃이 좋다고 했더니, 꽃 선물만 스무 번째


지난 토요일, 빗속에서 우산과 꽃다발이 담긴 비닐가방을 들고 서있는 남자친구를 만났다.

차를 몰고 온 내가 빵-하자, 남자친구는 멋쩍은 듯 어정쩡한 웃음을 띠고 천천히 다가왔다.


머릿속으로 웬 갑자기 꽃 선물이지?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오늘은 생일이거나 기념일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크게 잘못해서 나의 성질을 누그러트릴만한 뇌물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석가탄신일에 꽃다발을 선물하는, 특이한 규칙이 있는 커플도 아니었다.


문득 며칠 전 통화가 생각났다.

나이가 다 차도록 취업에 허둥대는 꼴이 우스워서 남자친구에겐 틈새만 조금 열어 보였었다.

"내가 뭘 해주면 기분이 좋아질까?" 언제나처럼 그의 다정한 말에 '그걸 꼭 말해줘야 아나'는 식의 괜한 투정과 화풀이로 응수했었다.


남자친구는 쑥스러웠는지 말없이 뒷좌석에 꽃을 실은 뒤, 조수석에 앉았다. 보통 차에 타자마자 나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게 더 로맨틱하지 않나? 보여달라고 했더니 있는 힘껏 몸을 젖혀서 힘들게 꽃을 꺼내 들었다.

"웬 꽃이야? 내가 요즘 힘들어해서 준비해 준거야?" 물었더니 그렇단다.

비 오는 날 애써 선물을 준비한 남자친구의 모습에 살짝 뭉클함도 잠시, '또 꽃이야?' 모난 마음도 툭 튀어나왔다.

남자친구는 연애 초기 몇 번의 선물이 실패하다가 꽃이 제일 성공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어김없이 꽃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선물 받은 횟수가 족히 20번은 넘을 정도.


비 많이 오는데 어디서 꽃을 샀냐고 물으니, 이전에 우리 동네에서 샀던 꽃다발은 예쁘지 않아서 다른 동네에 들려 다녀왔단다.

사장님께 '격려'의 꽃말을 가진 꽃으로 부탁드렸지만, 꽃말은 그게 그거라고 하시며 그냥 만들어 주셨다고.

여기도 꽃다발 디자인이 그다지 세련되진 않은 것 같다며 깜짝 선물에 대한 셀프 피드백도 덧붙였다.


자신의 깜짝 선물이 성공했다는 걸 직감하며 기분 좋게 조잘대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의도대로, 깜짝 선물은 대성공이었다. 공복의 12시, 심지어 길이 막히는 데도 이유 없는 짜증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한편으론 심술궂은 마음에 맨날 꽃만 줘? 다른 선물은 없어? 기어이 물어봤다.

넌 꽃을 제일 좋아하잖아, 다른 선물 주면 별로 안 좋아할 거잖아. 경험자의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맞는 말이다. 딱히 필요한 것은 없지만, 취향은 확실한 나는 남자친구가 해주는 선물들이 종종 눈에 차지 않았다.

센스 없는 남자친구는 한창 아이디어스에 꽂혀서 액세서리 등 온갖 선물을 그곳에서 주문하기도 했다.

두 번의 생일을 '메이드 바이 아이디어스'로 보내고 난 후, 참다못한 나는 받고 싶은 선물을 지정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 왜 이 선물이 최선인지 이해가 안 되는 나의 핀잔과 최선을 다한 남자친구의 속상함이 뒤섞였던 선물 교환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연애 초기엔 센스가 없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불만이었다.

비싼 선물을 바라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평소 갖고 싶어 했던 물건이거나 선물로 받으면 기뻐할 만한 정도의 값어치 있는 선물이면 족했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나에게 준 선물은 블루 큐빅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 내 이름을 새긴 독서링, 해변이 장식된 유리병 양초 등이었다. 남자친구의 고민이 담긴 선물 자체는 정성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눈높이가 생긴 20대 중후반이었던 나의 눈에 차지 않는 게 문제였다.


남자친구의 마음을 의심할 때도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가격대로 선물을 맞춰서 옷, 신발, 가방 등을 선물하는데, 내가 받은 선물은 그거의 반도 안 되는 것 같네. 일부러 나에게 쓰는 돈을 아끼려고 20살 때 나 사줄 법한 선물을 사주는 건가?

지금까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나 만날 때 돈을 따지는 사람이었나?

애써 고맙다며 웃어넘겼지만, 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는 혹시 내가 남자친구에게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인가 서러움에 복받칠 때도 있었다.


연애 6년 차이자 결혼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그런 의심은 모두 사그라들었다.

물론 남자친구가 센스가 없다는 걸 다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애로운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대신 하나하나 남자친구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내가 말한 대로 따라오도록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선물은 서로 가격대를 맞춰야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 선물은 어느 정도 브랜드 이름이 있는 것으로 고를 것, 마지막으로 아이디어스 선물은 앞으로 절대 금지.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자친구는 자존심 상해하기도 했고, 자신이 열심히 고른 선물을 질색하는 내 모습에 서운해하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양심이 있냐며 펄쩍 뛰는 나에게 금방 꼬리 내리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의 남자친구도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별로인 선물을 준비했었는지 스스로 충분히 깨닫고 있다.

시간이 지나니 실소가 터지는 해프닝이기도 하고, 이만큼 남자친구를 사람 만들어놓은 나의 인내심이 대단하기도 하다.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꽃다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결국 꽃다발을 대체할 어떤 선물이 있을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선물의 형태에 남자친구의 마음을 비쳐보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졌다는 것,

여전히 서툴더라도,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하는 남자친구의 마음은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평범하고도 다정한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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