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 담긴 속마음에 대하여
퇴사를 한지 n개월이 지났다.
원체 집순이인 나는 퇴사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컴퓨터로 다른 일자리도 찾아보고, 책을 읽기도 하고. 식물을 몇 가지 더 들여놓기도 하고. 가구 배치도 바꿔보고.
새로 생긴 아이패드와 아이펜슬로 그림 그리기 강의를 듣기도 하고. 블로그에 글도 끄적거려 보고.
누가 '퇴사하고 뭐해?'라고 물어보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지만 어찌 됐든 나름대로 이것저것 하면서 보냈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퇴사한 후 첫 2개월은 후련함과 함께 약간의 후회가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노력한 만큼, 나의 능력을 알아주는 더 좋은 곳에 곧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기 때문일까.
몇 번의 면접을 보고, 몇 번의 거절을 들으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불안감이 올라왔고, 미운 생각이 기어 나왔다.
'성급하게 회사를 나온 게 아닐까'. 더 나쁘게는 '결국 거기가 내 수준에 맞는 회사였던 건 아닐까'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생각 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었지만, 잠잘 때는 약해진 틈새로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꿈속에서 나는 전 회사에 근무하기도 하고, 전 회사의 면접을 다시 보기도 했다. 끔찍한 꿈이었다.
퇴사 후 여유로워 보이는 나의 모습 이면에 초라한 속마음을 들킬까 어디에도 말하기 싫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뀐 지금의 나는 여전히 백수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장 부러운 것은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지금 가장 부러운 것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밝은 미소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거의 매일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면서도 내가 가장 부러운 일이 취직이 아니라는 것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누군가는 이런 나에게 '백수가 할 수 있으면 편하긴 하지'라든지, '아직 취업하고 싶지 않은가 보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마음을 들여다볼수록 목소리는 분명해졌다. 내 행동은 속일 수 있어도, 불쑥 튀어나온 본심은 숨기기 어려웠다.
왜 나는 비슷한 처지에서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할까?
영원히 걱정 없는 백수이고 싶어서?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부러워한 이유는, 내 마음속 불안함을 잠재우는 방법과 인생의 풍만함을 찾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직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다닌 회사는 다닐만했지만,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지겨웠다. 현대에 합법적인 고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왜 써야 하는지 모를 글을 쓰고, 인사도 나누기 싫은 상사에게 피드백 받고, 뭐가 더 나아진지 모를 글을 배포했다.
시계만 바라보다 퇴근시간이 되면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지겨워 죽겠는 업무를 하면서도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1년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더 견뎌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돈도 있고 경험도 쌓았으니 나와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인 백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딘가 묶여있다.
책상 앞에 묶여 가고 싶지도 않은 회사의 사업 내용을 훑어보고, 나를 관심 있어 할 만한 곳에 지원서를 냈다.
표정도 감정도 어딘가 묶여있다. 입꼬리는 쉬이 올라가지 않았고, 감정도 어딘가 묶여 고정된 기분이다.
마음껏 웃지도, 마음껏 괴롭지도 않은 고여있는 듯한 기분. 감정도 기분도 제 자리를 잃고 백수가 되어버린 걸까?
즐기는 사람은 스스로 편한 방법을 알고, 자신의 처지에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행복도 확신이 있어야 생겨난다. 내 마음속에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기기 위한 빈자리를 남겨두어야 그곳에서 행복이란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공간을 차지한 감정은 대부분 걱정과 무기력감이다. 행복을 위한 공간은 비좁다. 좋은 곳에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내가 이런 걱정거리가 있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마음이 방금 싹튼 행복을 밀어낸다.
행복? 번듯한 직장도 계획도 없는 백수에겐 사치야. 못된 마음이 마음속 빈 공간을 조인다.
직장인이 되어도 백수가 되어도 스스로가 어색한 나.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감 넘치고 즐거운 사람들.
부러운 것을 찾아내고,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내 속마음이 분명해졌다.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스스로 자신감 넘치고 뿌듯한 인생을 살아갈지 알고 싶다.
사람은 무엇이든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내가 동경하는 것에서 가지지 못한 것을 발견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