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넘어 한 단계 나아가기
오랜 고심 끝에 아이패드용 키보드를 샀다. 어느 유명 작가의 인스타 속 키보드를 이용한 글작업 사진을 본 이후부터 고민을 시작했다는 건 덮어두고. 아무튼 키보드가 생기면 글을 무척 쓰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가 없진 않았다고 고백한다. 결과는, 책상 위에 커다란 숙제 하나가 더 얹어져 날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나는 전보다 더 무거워진 아이패드와 키보드 덩어리를 째려보며 어떻게 하면 글로부터, 일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장비가 생겼다고 달라지는 문제가 아녔다. 역시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저녁 6시, ‘4시엔 윤도현입니다’ 라디오에 이어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틀어놓고 밥을 짓는다. 냉장고에서 죽어가는 버섯을 구출하기 위해 버섯전을 만들기로 한다. 밀가루를 쓰지 않고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청양고추, 쪽파를 쫑쫑 썰고 계란 세 알을 풀어 섞는다. 소금후추로 간을 한 뒤 일단 한 주걱 떠서 부쳐본다. 나는 요리를 잘 못하고 그중에서도 간을 제일 못 맞추기 때문에 한 입 먹어본 다음에 간을 추가하곤 한다. 내 입에 짠 듯한 느낌이 나도록 소금을 더 넣고 나머지를 부친다. 태권도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간이 적당한지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합격. 밥과 전이 준비되었으니 여기에 무엇과 함께 먹으면 어울릴까 고민하며 이 글을 쓴다.
휴대폰 메모장에 글을 적을 때보다 확연히 좋은 점이 있다. 타이핑이 쉬운 것은 물론이고, 화면이 넓으니 뭔가 사고의 폭이 함께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쓸 수 있는 글의 폭이 넓어질 것만 같달까. 저녁을 준비하는 잠깐의 시간, 짬을 내어 글을 적는 지금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펜을 들어 글을 쓸 만큼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기에 글쓰기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느낌은 괜찮은 효용감이다. 조그만 휴대폰을 들고 오타를 지워가며 씨름하는 나보다, 아이패드를 적당한 각도로 세워 키보드로 타이핑을 하는 내 모습이 더 그럴싸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체를 넘어 한 단계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진다. 자아존중감, 혹은 자기 효능감이 올라가는 것만 같다. 작은 도전과 변화를 포착해 내어 칭찬해 주고 감사해 하는 일. 잘 지은 밥 한 끼를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매일 섭취해줘야 하는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