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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음에 대한 변명 혹은 고찰

by 수달씨


비 오는 아침이다. 나는 날씨를 많이 타는 사람이고 해가 있는 날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맞지만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나는 흐린 날을 힘들어하는 것이지 비가 오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예 비가 와버리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내가 사는 퇴촌은 팔당이 가까워서인지 아침이면 안개가 자주 낀다. 일교차가 큰 아침이나 오늘 같은 날은 구름 속에 있는 것만 같은 채로 오전 시간을 보낸다. 점심때쯤이면 걷히려나.


자꾸 ‘작은, 간단한‘ 수술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어떤 수술을 받고 3주 정도 되었다. 한 달 쯤부터 완전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나의 마음은 벌써 산이며 들이며 돌아다니고 있다. 다만 요즘 작업이 없고 돈도 없다 보니 강제 요양이랄까, 집에서 쉬는 날이 많다. 집안일도 다 하고 일상에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아도 외출한 다음날이나 하늘이 흐린 날은 하루 종일 누워있게 된다. 일이 없으면 쇼핑센터나 도서관을 가서라도 바깥에서 에너지를 받아야 하는 내향인처럼 보이는 외향인(모 예능에서 한 배우가 이런 성향을 ’조용한 외향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적절해 보인다.)인 나로서는 지금의 생활이 낯설다. 십여 년 전 임신 막달 직전에, 배뭉침이 심해 산부인과에서 2주간 누워만 있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온종일 소파에 누워 드라마 몰아보기(’별에서 온 그대’를 봤다)라는 걸 해보고는 참으로 오랜만의 공식적인 휴식이다.


몸은 쉬어도 생각은 많다. 가장 덩어리가 큰 생각 또는 걱정은 일이 없다는 것과 대출금 상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생각한다고 어떻게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닌 문제라서 최대한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걸 제외하면 나는 사실 ‘이런 곳에 (놀러) 가고 싶어’, ‘이런 걸 먹고 싶어‘, ’여행 가고 싶어’, ‘이런 물건을 갖고 싶어‘ 라는 등의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주로 한다. 앞서 말한 일과 돈에 대한 생각은 생각이라기보다 걱정에 가깝다. 뭔가를 시도하거나 실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놀고 싶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적극적이랄까. 게다가 요즘에는 뭔가 관계 욕구가 생겨나는지 이런저런 사람들이 자꾸 꿈에 나오고, 그런 것들이 나를 심란하게 한다.


예전에 심리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께 ‘어린애들이 할 법한 고민을 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내게는 공부나 자기 계발을 통해 더 나은 스킬/스펙을 쌓아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라거나, 내 사업체를 이만큼 키워봐야겠다, 혹은 흔히 말하는 10억을 벌어야겠다 라는 종류의 욕구가 없는 것이다. 다만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려면 한 달에 얼마 까지는 벌 수 있어야 하는데, 돈을 이만큼 아껴야 하는데…‘ 라는 정도의 걱정만 있을 뿐이다. (육아 성향도 비슷해서 아이가 나중에 제 밥벌이만 하고, 남에게 피해만 안 주고 살면 좋겠다는 정도의 바람이다.)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철이 없다. 십 대~스무 살 초반의 정서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TV를 보거나 라디오 듣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고, 누구랑 친해지고 싶고, 누구랑 연애하고 싶고, 연예인이나 학교 선배 언니나 선생님이 좋았던 그 시절에서 대상만 달라진 느낌이다. 다만 돈은 벌어야 하고, 아이는 키워야 하니 어른인 척(?) 행세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피해 주기는 싫어서 꾸역꾸역 성인의 의무를 다 하고 있달까. (그리고 세상의 정의가 이상하게 돌아가니 원치 않게 뉴스도 봐야 하고… 너무 싫지만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나의 철없음에 대해 고찰을 해봤다. 물론 계기는 있다. 얼마 전 사회생활 체험 삼아 참여해 본 어떤 모임에서 나보다 더 어린 사람이 미용실 실장이라고 해서 놀랐다. 그 모임을 소개해 준 동생은 꽤 야무진 친구라 늘 주변에 베풀고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앤데 최근에는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단다.(나에게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했는데 나의 답변은 “공부~? 공부를 왜 해~? 어우, 싫어 싫어”) 그 아이는 우리 나이에 실장 정도는 당연하다, 자기도 육아로 단절되지 않았다면 직업 경력 20년차일 거라고... 그런 말을 들으니 나의 사소한 고민이나 욕구들이 정말로 사소해 보인다. 나는 ’어서 몸이 나아서 등산을 가고 싶어’, ‘남편 바쁜 일 끝나면 오토바이 여행을 가자고 해볼까’ 이러고 있는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니 역시나 나 자신이 초라하고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안된다.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돼.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이런 나의 성향도 언젠가는 무언가에 쓸모가 있겠지. 다 떠나서, “뭐, 어때!” 라고 외치고 싶다. 어쨌든 불규칙해도 밥벌이는 하고 있고, 내 할 일은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런 마음을 기록하고 싶어서 정말로 오랜만에 아이패드를 열어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나의 철없음에 대한 변명 혹은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항변을 해야 할 정도로 ‘철없음’ 키워드는 내게 아킬레스건이다. 평생을 이것과 싸우는 것 같다. 벗어나고 싶지만 또 보듬어주기도 해야 하는 내 정서의 베이스라고나 할까.


어쨌든 오늘은 ‘철없으면 좀 어때!‘ 모드이고 싶다. 다 큰 어른인 척하느라 애쓰며 사는데 그런 날도 있어야지. 그리고 아마 분명 나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숨겨진 ’철없음‘ 버튼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버리고 싶지만 도무지 버려지지 않는 자신의 어떤 베이스 성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든 모두 응원한다. 어른인 척하느라,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 척하느라 애쓰면서 살고 있을 모두를.



*시국이 시국인지라 더더욱 이런 주제의 글이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더라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니. 부디 철없어 보이더라도 너그럽게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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