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의 시간 관리
고백하자면 나는 쇼핑몰을 좋아한다. 그곳은 예쁜 것들로 넘쳐나고 쾌적하고 익명성도 있어 눈치 볼 필요도 없이 편안하다. 작업이 없는 경우 낮시간에 대체로 시간이 자유로운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시골마을을 벗어나 대형 쇼핑몰로 향한다. 맛있는 식사나 커피를 사 먹기도 하고 돈을 아끼도 싶을 땐 도시락을 싸갖고 나와 푸드코트에 한참 앉아있기도 한다. 한창때처럼 모든 층을 돌며 소비의 도파민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그냥 그 장소가 주는 편안함이 이상하게 좋다. 홀로 고립된 듯한 시골 생활을 벗어나 많은 사람을 마주치고 구경하는 것도 내겐 재미다. (지금도 잠실의 모 쇼핑몰 내 잡화매장 한 켠에 자리한 휴게공간에서 책을 한 권 보다 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략 두 종류의 사람군을 볼 수 있다. 나처럼 유유자적 쇼핑을 하거나 홀로 또는 사람을 만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듯한 사람들과, 푸드코트 조리원이나 매장 판매원 등 이곳을 일터로 삼아 출근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밖에서 보기엔 전자의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매 순간 느끼는 나로서는 후자의 인물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때론 죄책감마저 갖곤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누구 혹은 무엇일까. 프리랜서? 사업가? 일하는 전업주부?(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간헐적 백수? 노동자여야 하지만 현재 불가피하게 노동 공백인 사람? 꿈을 찾아 방황하는 한 마리 파랑...새?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한 인상깊은 말이 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책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세상에 유일하게,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하루 24시간이다.”*
(그래서 물리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지 말고 오히려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했고, 책의 저자는 돈보다 꿈을 위해 시간을 잘 계획하고 관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위 문장은 내 생각과 다르다.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오죽하면 급여도 ‘시간’ 단위로 계산된다. 시간이 돈이고 돈이 시간인 세상에선 돈이 많으면 시간을 살 수 있어 이미 유리한 출발선이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의 하루는 48시간일 수도, 돈이 없는 사람의 온전한 하루는 고작 5시간일 수도 있다. 만약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 직접 간병을 해야 한다면 돈을 주고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과 시간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에 청년들과의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 대학생 친구는 자신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벌 시간에 다른 돈이 많은 친구들은 어학연수를 가고 학점 공부를 더 한다며 속상해했다. 그런 식이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 아니냐'는 뼈있는 말속에 자리한 깊은 상실과 어둠이 여운으로 남아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던 기억이다.
(비슷한 예로, 이것도 여기 잠실의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혼자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뒷편에서 한 무리의 앳된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야, 오늘 우리 여기서 영화보고 먹고 논 거 메꾸려면 알바 몇 시간 짜리냐.” “아, 몰라. 일단 오늘은 그냥 즐기자.” 나는 혼자 속으로 눈물을 삼켰는데 그 애들이 과연 뭘 얼마나 잘 먹고 잘 놀았을까, 대단히 비싸게 놀지도 못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 제목에 대한 나의 결론은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이다. 심지어 나 같은 ‘시간맹’ 그러니까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흘려보내거나 너무 타이트하게 쓰기 일쑤인 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mbti의 j(계획형)냐 p(즉흥형)냐 고민해 봐도 잘 모르겠다. 굳이 정하자면 계획이 있는 게 덜 불안하지만 계획을 지키지 않는 걸 좋아하는 이상한 유형이랄까. 계획이 있되 계획을 벗어남에서 쾌감을 느낀달까. 적고 보니 더 이상하다. 아무튼 나는 그렇다.
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에 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요즘에는 ‘시간관리’에 대해 배웠단다. 중요하고 급한 것 / 중요하고 안 급한 것 / 안 중요한데 급한 것 / 안 중요하고 안 급한 것으로 구분하여 어쩌고 저쩌고 해야 한단다. 나는 ‘왜 우리는 진작 그런 걸 배우지 못했지? 아쉽다, 흘려 보낸 내 시간아~’ 이제와 이런 한탄만 나온다. (어제는 아이가 내게 ‘돈의 우선순위를 고민해야 한다‘ 라는 훈계를 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걸 못해 문제인 나는 그저 눈물이 맺힐 뿐이다. 또로록.)
몇십 년째 숙제를 풀지 못하듯 돈과 나와의 관계, 시간과 나와의 관계, 그밖에 소비/미니멀리즘/생태적/여성주의적 삶 등 여러 가치문제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다. 그런 고민 때문인지 중고서점에서 오랜만에 미니멀라이프에 관한 책을 집어 들게 되어 여기 앉아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어떤 영감을 발견할지 아니면 또다시 스트레스로 작용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 문제들이 향하는 지점은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지구를 살아가는 나의 몸은 하나인데 이 열악한 몸뚱이로(시간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의 몸뚱이도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은 말해 무엇하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로소이다. 그걸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중고책방에서 쓴 만원은 일단 아깝지 않은 걸로 하자.
그리고 책의 내용 중 '전업주부의 시간관리' 부분은 '프리랜서의 시간관리'로 번역하여 본다면 퍽 유익하기도 하다. 더불어 나 자신을 전업주부 포지션으로 생각해 본 적 없음에 대해, 그것이 담고 있는 정치사회적 함의와 나의 의식편향 문제에 대해 고찰하게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향후 글로 쓸 수도 있고 못쓸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덕에 '오글완'(오늘 글 완료. 오늘 운동 완료를 줄여서 ‘오운완’이라고 하니까. ) 했으니 적어도 지금은 만족스런 시간 사용이었다고 자부해 본다.
*비교로부터 자유로운 미니멀 라이프 78쪽. (뿌미맘 지음, 느린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