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문 닫는 서점이 많다는 걸 모르고 서점이나 갈까 하고 밖에 나와버렸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언니가 일하는 회사 근처에 가서 수다나 떨자고 불러낼까 했지만 연휴 끝난 월요일이라 바쁘단다. 갈 곳이 없어진 김에 암사동 동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 시장 근처에서 방울토마토를 사버렸으니 가방도 무거워져 오늘 어디 멀리 가기는 글렀다.
이곳은 큰 시장이 있어 채소 과일 값이 무척 싼데도, 자꾸만 과일가게가 더 많이 생기고 있다. 역 주변의 임대가 붙은 공실마다 과일가게가 들어서니 청과물시장인가 싶다. 내가 사는 퇴촌은 모든 게 다 비싸지만 과일은 더더욱 그래서 암사동에 나올 때마다 과일을 산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한 집 건너 하나씩 과일집이 생기면 사는 사람이야 저렴해서 좋긴 한데 파는 사람들은 괜찮을까. 서로 제 살 깎아먹기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종류의 생각을 달고 산다. 비어 있는 임대 자리를 보면, 이런 가게가 들어서면 좋겠는데, 그러다 생각과 다른 종류의 가게가 들어서면 아이고, 저건 아니지 한다. 비슷비슷한 가게가 자꾸 들어서면 ‘나라에서, 지자체에서 이런 걸 좀 조율해 주면 안 되나? 자영업자지원센터 같은 곳을 만들어서 상권분석도 해주고 말이야.’ 이렇게 오지랖을 떤다.
그밖에도 혼자서 많은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 나는 발명가이고 창업가이고 정책가다.
- 로드킬 앱이 생기면 좋겠다. 그러면 신고도 빠르고 편리하고, 지도 위에 표시하는 방식으로 신고하면 중복신고될 일도 없고 내 위치를 주소로 찾는 수고도 덜 수 있잖아. 게다가 기록이 전국 단위로 아카이빙 되니 상습 로드킬 구간에 대한 조치도 취할 수 있고 추후 자료로도 사용되고... (현재 로드킬 신고는 지역별로 관할 주민센터 같은 곳에 민원을 넣어야 함.)
- 태양광 시설을 버스정류장 상단마다 설치하면 그늘막 역할도 되고, (버스정류장은 상단이 투명해서 해를 가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온열의자 등에 쓰는 전기도 충당하고 좋을 텐데.
- 은행, 주민센터마다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 및 피해 구제를 위한 상담창구를 설치하면 어떨까?
- 동네마다 맨발 걷기 존이 있으면 어떨까? 적은 예산으로 큰 만족! (개인적으로 맨발 걷기를 좋아하는데 할 곳이 없어서 사심으로.)
- 30인 이상 기업은 면접 대상자에게 5~10만 원씩 면접비 지급을 의무화하면 어떨까? 차비도 들고 옷이랑 머리도 해야 하고 드는 돈과 에너지가 만만찮다던데.
- 파스타 재료를 각자가 골라 선택할 수 있는 파스타 가게는 어떨까? 일명 내 맘대로 파스타. 면 종류, 소스, 토핑, 맵기 정도까지 말이야. 키오스크도 좋지만 귀엽게 재료들이 그려진 카드를 골라 바구니에 담아 카운터나 주방에 보내는 거지.
- 나 같은 빵순이 여행자들을 위해 빵 보냉배낭이 있으면 어떨까? 이동 중에 빵이 망가지지 않고 신선하게 집까지 가져갈 수 있게~ 기왕이면 한화 이글스와 대전 성심당이 콜라보해서 만들면 지역색도 있고 좋겠다!
이런 식으로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두는데 실현할 방도는 없다. 로드킬 앱에 대한 생각은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는데 꽤나 구체적인 디자인도 갖고 있다. 아이디어 저작권 내놓으라고 안 할 테니 가져가서 누가 만들어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딱풀이나 물풀 뚜껑에 본체와 연결된 줄이 달려 있으면 잃어버릴 염려가 없을 텐데, 라고 아이디어만 생각하고 아직까지 발명해내진 못했듯이 지금의 아이디어들도 아마 실현되진 못할 것이다.
나의 오랜 상상 혹은 망상들에 대해 밝히는 것은 부끄럽지만 어차피 실현되지 못할 거라면 이렇게 증거라도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정말로 누군가가 만들어 준다면, “봐! 내 아이디어였어!” 라고 자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역시 조금 몽롱하다. 어쩌다 보니 ‘카페인 찔이’(맵찔이의 변형)가 됐다. 술도 담배도 안(못) 하는데 카페인 너마저... 몽롱한 채로 머릿속을 뒤적거리니 더 어지럽다. 상상인지 몽상인지 망상인지 모를 것들이 뇌 속 우주에 산처럼 쌓이는데 몸은 작고 비루해 카페인도 이제는 소화를 못한다. 노안도 와서 스마트폰 화면도 흐릿해. 얻다 쓰냐.
카페인 주정으로 이만큼 주절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방에 방울토마토 한 팩 담아 버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상상의 우주는 크지만 현실의 나는 3천 원짜리 방울토마토 한 팩에 좌지우지될 뿐이다. 요즘 종종 과학 채널들에서 우주, 블랙홀, 양자역학, 얽힘, 카오스와 나비효과, 상대성 이론 등등 이해하긴 어렵지만 신비롭고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찾아보곤 한다. (나는 철저한 문과생.) 그러면 우주와 이 세상은 정말이지 방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데 우리 인간들은 그에 비해 개미보다 작고, 내가 하는 고민들은 하염없이 작고 옹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울토마토를 짊어지고 개미처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 그래도 오늘 이런 글 한편 남겼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훗날 이 망상의 흔적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모를 일이다. 미래의 인간들이여, 보고 있나?